돌봄의 한계가 투자 논리가 되기까지
아이는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지금 몇 시야?"
이건 시간 확인이 아니다. 일종의 리셋 버튼이다.
지금이라는 순간을 다시 불러오는 방식.
문제는 이 버튼이 '서버 마비' 수준으로 눌린다는 거.
처음엔 아무렇지 않다. "세 시야."
두 번째도 괜찮다. "아까랑 똑같아, 세 시."
세 번째, 설명이 붙는다. "조금 전에 말했잖아, 세 시."
다섯 번째쯤 문장은 짧아진다. "그만."
여덟 번째쯤 되면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한다.
그리고 열 번째...
이쯤 되면 깨닫는다.
나의 인내심이 이토록 비루하다는 걸.
동시에 '부모 자격'이라는 단어와 충돌하는 순간 힘들어진다. 이건 인성이 아니라 하드웨어 문제이건만.
인간은 '효율'이라는 알고리즘을 따르는 종이다. 당연히, 의미 없는 반복 작업에 CPU를 뺏기면 본능적으로 렉이 걸린다. 이걸 자책 도구로 삼으면 나만 손해다. 그냥 내 사양이 '반복 질문 10회 미만용'이라고 인정하면 죄책감도, 자괴감도 낼 필요가 없다. 감정 과부하를 인성 탓으로 돌리는 건, 제품 결함을 사용자 과실로 둔갑시키는 거다.
아이의 장애 진단 이후, 숱한 돌봄 방식을 거치며 수집한 데이터가 하나 있다. 사람은 나쁘지 않으나, 유지 보수가 안 된다는 것. 처음엔 온 마음으로 달려들고, 중간엔 조용히 감당하다가, 마지막엔 소리 없이 손절하고 사라진다. 실망이란 기대치를 잘못 설정한 투자자의 자업자득. 시장 탓이 아니었다.
누가 더 따뜻한가가 아니라, 누가 더 버티는가.
수백 번의 같은 질문에 일정한 데시벨을 유지하는 이.
맥락 없는 질문에 AI처럼 정확하게 답해주는 이.
몇 가지 조건을 필터링해 보면 인간이라는 섹터는
생각보다 빠르게 열외가 되고, 그쯤 되면 아주 자연스러운 의문이 든다.
이게 굳이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
돌봄을 꼭 뜨거운 감정으로만 구현해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다. 관계는 갈수록 비싸지고, 현장은 늘 적자다. 감정이 소진되지 않는 대체재가 있다면 훨씬 남는 장사 아닌가. 비윤리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질문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떡상하는 종목을 발견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죄책감보다 해방감이 먼저 왔다는 사실이, 어쩌면 이미 답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의 주식 종목 다변화를 모색하게 했다. 기업윤리니 ESG니, 있어 보이는 소리는 전부 스킵하고 내 기준은 오직 하나. "어떤 녀석이 끝까지 안 지치고 내 딸 곁에 있을 것인가." 그때부터 유독 집착하게 된 섹터가 하나 있다.
로봇.
그 이야기는, 조금 길다.
쓰는 동안 딸이 묻는다. "지금 몇 시야?"
이 모든 걸 깨달은 나는,
오늘도 세 시를 열 두번 답했다.
대단한 통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