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에세이를 쓰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AI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AI의 에세이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썼던 수필을 떠올려 봤다. 어떤 책을 읽고 받은 영감에 내 경험을 덧붙여 쓴 글이었다. '벽을 넘어뜨리면 길이 된다.'가 내게 영감을 준 아이디어였다. 우리가 평소에 시도해보고 싶었던 도전들-예를 들면 글쓰기, 책 읽기, 외국어 공부하기-은 점점 더 높아지는 벽이 되어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는 그 벽들에 둘러 쌓인다. 우리는 그 벽들을 건드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사실 보이는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벽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손을 대기만 하면 뒤로 넘어가는, 벽 그림이 인쇄된 커다란 종이일 수도 있다. 벽을 건드려 보자. 손으로 밀어 보자. 벽이 넘어진 곳으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수영'이라는 벽에 손을 대었고, 그 벽은 결국 넘어졌다(고백하자면 종이 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콘크리트 벽도 아니었다). 마치 기적을 목도한 사도처럼, 그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내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 작가가 참 멋있다고 느껴졌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욕망적' 글쓰기는 마치, 벅차오르는 감정을 '배설'하는 과정이었고,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내가 에세이를 썼던 이유였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아직은 AI와 소통하는 게 어렵다. 출처: 챗GPT 이미지 생성
"네가 쓰라고 했잖아"와 같은 유치한 답변은 없었다. 이 녀석, 매사에 너무 진지하고 마치 교수님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술자리에서 합석한다면 분명 재미없을 유형이다. 새삼 대화에서 농담이나 스몰토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답변을 곱씹어 보면, 내가 에세이를 쓴 이유와 닮은 구석이 있다. '불확실성'은 '벽'과 대응된다. '미지의 여정'은 그 '벽'을 넘어뜨리기 위한 과정과 같다. 그리고 그 벽을 넘어뜨리며 우리는 '성장'한다. 다만, 결론만은 확연히 차이가 있다. AI가 "인간의 성장과 변화를 탐구하고,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면, 나는 그냥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