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yoming
여러 가지로 마음이 건드려져 찌릿찌릿했지만, 또 고되기도 했던 하루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숙소로 가던 중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구경거리가 있다는 신호다.
머리에 쓴 커다란 왕관이 전혀 무겁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도도하게 들고 빽빽하게 밀집된 나무들 사이에서 엘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크의 한가로운 걸음은 너무 우아해서 기어 나온다는 표현은 감히 적합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유유히 풀을 뜯다가 다시 빽빽한 숲을 지나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듯 아련하게 사라졌다.
"우리 동네에도 엘크가 있는 거 알제?"
산타를 만난 아이처럼 들뜬 나에게 남편은 산통을 깨는 말을 했다.
"뭔 소리고? 고라니겠지."
"뿔이 없을 뿐, 엘크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엔 사슴을 키워 녹용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언젠가 지나며 노루인지, 사슴인지 애매한 그 가련한 동물을 본 적도 있는 것 같다.
엘크에게 뿔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매력이다.
누군가 녹용을 즐기시는 분은 머리털을 죄다 뽑혀봐야 엘크의 심정을 이해하시려나....
7월 초 옐로우스톤은 저녁 9시가 지나서야 해가 떨어졌다.
자전하는 지구는 주황색 하늘에 점점 더 짙어지는 푸른색을 칠하고 덧칠했다. 그럴수록 주황색은 보라색으로, 점점 쪽빛으로 그러데이션 되었다.
숙소로 가던 중 엘크 삼매경에 빠져 식당과 매점의 영업시간을 놓쳐버렸다.
늦은 저녁에도 밝게 비추는 해는 시간감각을 소실하게 하였고, 충청남도는 너끈히 잡아먹을 만한 사이즈의 국립공원은 시속 80km로 달려도 달려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에겐 짜파게티가 있어 굶주리진 않겠다 생각했는데, 로지엔 전자레인지는 물론 전기주전자도 없었다.
'살다 살다 뿌셔먹는 짜파게티 맛을 알게 되겠구나.'
우렁차게 꼬르륵 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흡족하지 않는 저녁 메뉴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데, 남편은 방을 휘 둘러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니 먹는 건 오빠가 책임질게."
남편은 캡슐 커피머신의 물통에 물을 채워 커피 캡슐을 생략한 채 커피내림 버튼을 눌렀다.
'쫄쫄쫄'
끓여진 물은 답답하게 짜파게티 봉지를 겨우 채웠지만 우리의 저녁은 부순 짜파게티 보단 맛있어졌다.
내 남편에겐 엘크의 뿔과 같은 머리카락은 좀 부족하지만 그 대신 삶을 1% 더 윤택하게 해주는 생활의 지혜가 있었다.
쪽빛 하늘은 어느새 완벽한 칠흑이 되었고 옐로우스톤 레이크에 뿌려진 별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