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yoming
그때 테턴은 나에게 요상스런 곳이었다.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거의 국민학교 입학 직전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우물을 길러먹었고 유일한 친구였던 S언니네 집에 가려면 어린 걸음으로 30분을 걸어야 했다. 30분이나 걸어야 했던 S언니네는 할머니 집에서 제일 가까이 사는 이웃이었다. 그 집엔 전화가 있어서 분가해 사는 가족들이 조부모님께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을 땐 S언니네를 통했었다.
어른이 된 후 언젠가 소보면에 갔었다.
S언니와 함께 뛰어다녔던 과수원, 여름이면 수영을 했던 개울은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30년은 길고 긴 세월임을 보여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과 함께 부대끼며 살았던 곳, 그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이젠 대한민국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겠구나.'
그로부터 또 10년이 흘렀다.
그렇게 그 오랜 추억은 기억 저 깊숙한 곳 어디쯤에서 서서히 잊힌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게 테턴 에서 그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꼈다.
이름 모를 풀 꽃과 잡초들이 마구잡이로 피고 자란 들, 그 사이를 좔좔좔 흐르는 냇물, 잡목으로 울타리를 친 외양간, 그 옆에 서있던 미루나무마저도 내 어린 시절 나를 한 없이 사랑하셨던, 젊고 건강하셨던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일부러 꾸미지 않고 자연 그대로, 버려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이름만 붙여두었다.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사람이 나 만은 아닌가 보다.
세계경제위기를 초래할 만큼 미국과 중국의 불화는 심각한데, 미국에 가보니 미국 관광수입은 거의 중국사람들 지갑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다니며 동양인을 마주치면 거의 중국인이었고, 그들과 스쳤던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을 확실하게 도장 찍어주는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냥 개울인데 Schwabacher's Landing 이란 이름이 있고, Elk Ranch Flats Turnout은 엘크가 없으면 그저 너른 풀밭인며, Oxbow Band는 모란산이 보이는 잔잔한 호수인데, 사실 꼭 옥스보밴드가 아니어도 그 주변이라면 호수와 모란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어쨌든 가만히 보면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을 감사하게도 그러지 말라고 이름을 딱 붙여놨다. 그들이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관광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갖춘 것은 아니었다.
옥수보밴드는 호수로 내려가는 비탈에 사람들이 하도 밟고 다녀 저절로 좁은 길이 난 곳이었는데, 비탈에서 보는 호수와 모란산은 피스풀 그 자체였지만 좁은 비탈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서로 여간 걸거치는게 아니었다.
붐비는 비탈은 감추고, 깎아지른 듯 솟은 산과 그 앞 잔잔한 호수는 부각해 사실은 북적거리는 곳을 평온한 곳으로 탈바꿈하는 사진을 찍으려 주변을 살폈다. 핸드폰을 들고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구도를 찾고자 했지만, 붐비는 곳에서 와이드 한 핸드폰카메라 앵글에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멀리 있는 모란산을 잘 찍어내기는 불가능했다.
'누구라도 찍혀야 한다면 우리를 찍자.'
"저기 서있어라."
남편을 포인트에 배치하고 우리가 배경에 스며들 수 있도록 앵글을 맞춘 후 돌멩이로 핸드폰을 받쳐두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훽' 잡아당겼다. 수년동안 필라테스로 단련한 균형감이 아니었다면 그 여자와 함께 비탈을 뒹굴었겠지만 용케도 난 중심을 잡았다. 나를 지지대 삼아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그 아줌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지나쳐 내려갔다. 또 중국말이었다.
"I'm ok."(전 괜찮아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고, 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 미소가 설마, 썩소였을까?
'쌩'
그 아줌마의 떨떠름한 어글리 페이스는 내 앞에서 변검쇼를 하듯이 순식간에 뒤통수로 교체되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김칫국을 사발로 시원하게 드링킹 한 것이었을 뿐, 그 알아들을 수 없었던 말이 고맙다거나 미안하단 의미가 아닐 확률, 거의 99.9%까지 대폭 상승했다.
'그런데 저 아줌마가 예의범절을 중국에 두고 왔나...'
대륙의 아줌마들은 무례한 포인트가 한결같다.
그 여자는 내가 맞춰둔 앵글에 등장하는 각도에 서서 누군가를 소리쳐 불렀다. 그녀의 남편처럼 보이는 사람은 대포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거대한 카메라 렌즈 앞에서 중국 아줌마의 떨떠름했던 표정이 화사해졌다. 내 작은 핸드폰 카메라엔 그녀가 나오는데, 그 대포 카메라엔 내 남편이 잡히지 않는지, 비켜달라는 말도 없이, 대포카메라의 셔터는 '촥촥촥'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필시 와이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표출되는 중국 남편의 열정적인 모습은 그의 장비만큼이나 전문가였다.
뚱뚱하고 못생긴 그녀의 모델놀이를 보며 행복한 정신병, 즉 공주병의 원인은 어여쁜 인물이라기 보단 그녀를 추앙하는 추종자의 존재임을 알았다.
예의범절도 못 챙겨 다니는 중국아줌마의 인생이 꽤 행복할 것 같아 씁쓸하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내 등을 내주고도, 엎드려 절도 못 받은 나처럼,
먼저 자리 잡고 서있었으면서 그 아줌마의 모델놀이가 끝나도록 시간이 정지된 듯 스탠바이 하고 있는 내 남편처럼,
그래서 권선징악, 인과응보가 있는 드라마를 사이다 삼아 시청하는 거겠지.
옥스보밴드를 지나 조금 더 달려, 거친 로키산맥이 은은하게 담긴 맑은 호수를 오롯이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풀 밭에 앉은 우리 앞에 펼쳐진 전경은 1990년대 영어 교과서 표지에서 튀어나온 듯 낯설지 않았다. 나와 남편을 그 배경 안에 넣으니, 겨우 중학생짜리가 톰과 메리와 프리토킹이 가능했었던, 엄친아, 엄친딸 이자 영어교과서 메인 캐릭터, 철수와 영희가 되었다.
엘크무리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기대했었던 Elk Ranch Flats Turnout엔 엘크대신 맨 눈으로 보면 작은 점박이, 망원경으로 보면 큰 점들로 보이는 버펄로 때가 만사 귀찮다는 듯이 게으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Buffalo Ranch Flats Turnout이 될 수도 있었던 이곳이 Elk Ranch Flats Turnout이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는 버펄로보단 엘크를 만나길 기대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나 보다.
소망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는 것, 이름 대로만 된다면 세상은 아름답기만 할 텐데,
안타깝지만 나도 내 남편도 우리의 고귀한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며 산다.
Elk Ranch Flats Turnout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