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 달팽이에게 배운 여유의 자세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다리 난간 위로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보였다.

보도블록 위를 기어가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



작은 껍데기를 짊어진 채

조심스레 길을 건너는 그 모습이

묘하게 나를 멈춰 세운다.



그토록 바쁘게 살아오면서

나는 한 번도 ‘멈춤’의 순간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다들 가니까, 나도 가야 한다고 믿었다.

빠르게, 그리고 더 빠르게.



달팽이는 그 모든 걸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기어가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흔들리는

그 미세한 촉수의 움직임조차 부러웠다.



‘저 느림 안엔 조급함이 없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다.

회의에 늦지 않으려 뛰어가고,

메일 한 통이라도 빨리 보내야 마음이 놓였다.

효율, 속도, 결과 —

그게 성실함의 다른 이름이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이 작은 존재는

그 어떤 성취도, 목적도 없이

그저 지금의 길 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그때, 바람이 달팽이의 껍질을 스쳤다.

햇살이 그 위에 번져 반짝였다.

그 반사된 빛이 묘하게 눈부셔서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까 다리 위에서 본 구름보다 더 희미하고,

더 여유롭게 퍼져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느림’이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박자를 되찾는 일이라는 걸.



누군가와 발맞추기 위해 뛰던 걸음을

이제는 내 리듬으로 걷는 일.

그게 어쩌면 진짜 용기일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동료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보고,

누군가는 커피를 쏟을까 봐 조심하며 걷는다.



그 사이를 나는 천천히 걸었다.

뒤처지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춘 것뿐이었다.

내 마음의 속도에 맞춰 걷는 중이었다.



그 짧은 걸음 속에서

묘하게 편안한 온도가 느껴졌다.

바쁘게 뛰던 내 안의 시계가

잠시 멈춰 선 듯한 기분.



회사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부른다.

“선배, 왜 이렇게 천천히 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오늘은 좀 느려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말이 내 귀에 머물렀다.

그리고 문득, 방금 전 달팽이가 떠올랐다.

그 조그만 생명은 지금쯤 어디쯤 갔을까.

아마도 아직 그 길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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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건, 세상과 보조를 맞추는 대신 나와 보폭을 맞추는 일이다.

— Hyun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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