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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 커피같은 내리사랑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있었다

by 서이담

승진 누락 후 며칠이 안 되었을 무렵, 한 선배가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며 밥을 사주셨다. 좀 비싼 밥을.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 후배 이야기가 나왔다. 그 후배는 나와 업무가 겹치는 사람도 아닌데 그 친구를 보면 내 예전 시절이 떠오른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잘못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필요 이상으로 오지랖을 부리고 도와주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어이없는 대우를 받고 있지만 아직 그걸 어떻게 방어할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


나는 선배에게 그 후배가 꼭 예전의 나 같아서 마음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선배는 본인도 내가 본인처럼 입사 후 인정을 잘 받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쓰였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 앞가림만 하려고 하는 치사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 슬프기도 하고 억울함에 화도 났다. 그렇지만 돌아보니 내가 그런 사람들만 만난 건 아니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다행스럽게도 주위에 한 두 명씩은 꼭 있었다.


어리석게도 난 천성이 착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사랑받았다. 그래서 받은 만큼 어쩌면 받은 것보다 훨씬 적게 다른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기억을 꺼내볼까?


행복한 기억 하나, 승진이 안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 한 차장님이 나를 카페에 데리고 가서 한참이나 내 말을 들어주시고 위로해 주셨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밥을 사주시면서 본인이 미안할 일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눈물을 보이시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기억 둘, 내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신입시절, 한 과장님이 내가 언젠가는 크게 잘 해낼 수 있는 사람 같다면서 나를 믿지 못하는 상사에게 좋은 말을 해주신 걸 나중에 전해 들었다.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행복한 기억 셋, 내가 업무적으로 큰 실수를 해서 이걸 어째야 하나 막막했을 때 나를 조용히 회의실로 데려가 함께 사고를 차근차근 수습해주시던 한 대리님이 있었다. 그리고 사고 수습 후 너는 이런 일들도 겪었으니 더 큰 사람이 될 거라며 용기까지 주셨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이렇게 떠올리다 보니 고마워서 주책없이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이를 먹으니 눈물만 많아지는 것 같다.




직장에서 짜증 나는 사람과 화나는 일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쉽다. 그런 일들은 매번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득이 될 건 없다. 기분만 나쁘고 또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하기가 더 힘들 뿐이다.


화가 날 때는 반대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마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게 좋았다. 특히 눈물 날만큼 감동적이었던 순간들.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한결 나아지고 내면에 숨어있던 힘이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기분이 든다. 직장생활 그까짓 거.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가끔씩은 주변을 둘러보며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조금 더 챙겨주면 좋겠다. 내가 제일 막내라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 음료수라도 한 병 챙겨드리면서.


예전에 받았던 사랑만큼은 아니더라도 드립 커피처럼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담아 사랑을 졸졸 흘러내린다면 그 사람도 힘든 시기를 살아갈 용기를 가져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나의 오늘 하루는 성공이다.


Photo by The Matter of Foo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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