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 합격 발표 날, 긴장감에 아침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보다 학력고사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거실에 있는 전화기 앞에 앉는다.
발표 시간이 되자마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왼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오른손으로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뚜-뚜-뚜-뚜-.”
통화 중 신호만 들린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다시 꾹꾹 누른다. 사람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인지 연결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더 초조해진다.
“안 되겠다. 내가 올라갔다 와야겠어.”
옆에서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기러 방으로 들어가신다.
‘서울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반 거리인데…….’
말릴 틈도 없이 급히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전화기를 통해 “불합격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학교 성적이 좋아 잘난 척하며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져 자란 양 부모님께 뻣뻣하게 콧대를 세웠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한 실패였다.
그 먼 길을 가서 합격자 명단에 딸의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저녁 무렵 돌아오신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막막한 마음으로 후기시험에 응시했으나 또 떨어져 좌절감만 커졌다. 대학을 가서 집에서 나가 독립하기 위해 수년 동안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터라 대학 실패는 청천벽력이었다.
며칠 후 풀이 죽어 있는 나에게 엄마가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아빠는 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냥 미용기술이나 배워서 취직했으면 하신다.”
“뭐라고? 나보고 대학 가지 말고 그냥 미용사가 되라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게 전교 1등 딸한테 할 말이야?”
아버지의 말씀이 너무 섭섭하고 서운해서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나는 말도 거의 안 하고, 아버지가 말을 건네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환갑잔치 안 할 테니 그 비용을 재수시키는데 씁시다.”
결국 엄마는 당신의 환갑잔치를 포기하셨다. 오빠 언니들도 재수 비용을 보태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둘째 언니가 서울에 올라와 재수학원과 하숙집을 알아보고, 둘째 오빠는 하숙집에서 사용할 책상을 사 줬다.
6남매의 막내인 나는 그렇게 온 가족의 지원 덕에 재수를 시작한다.
어둡고 무거운 좌절감을 안고 20년 간 살던 고향과 가족을 떠나 홀로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올라오니 모든 게 힘들었다. 서울역 근처에 있던 대형 재수학원은 회색빛 콘크리트 10층 건물이었고, 창문도 없는 교실에서 100명 정도의 재수, 삼수생들이 빼곡하게 앉아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수가 500명 정도였는데 그 열 배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엄청난 규모였다. 규모에 우선 놀랐고 빼곡한 학생들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1시간 이상 거리에 사는 아이들이 새벽같이 학원에 온다는 사실이었다.
‘저렇게 멀리서도 이 새벽에 오는데 5분 거리에서 하숙을 하는 나는 힘들어하면 안 돼.’
나는 내면의 소리를 되뇌며 다짐했다.
전국에서 온 학생들은 의대 치대를 목표로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그 속에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주눅 들고 의기소침한 상태로 조용히 있었다. 가장 힘든 건 존재감이 없는 것과 외로움이었다.
충정로 골목에 있는 낡은 한옥 건물들이 모두 하숙집이었다. 하숙방은 책상 두 개에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크기였다. 한쪽 모서리가 둥글게 기울어져 직사각형 모양도 갖추지 못했다. 작고 낡은 창문이 있기는 하나 옆집 담에 가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낮에도 불을 켜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달 하숙집 아주머니께 하숙비 33만원과 내 용돈 7만원을 보내 주셨다. 그리고 몇 백이나 되는 학원비와 매달 40만 원을 보내기 위해 경비원 일을 시작하셨다. 고등학교 때까지 술을 드시면 자주 힘들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공치사’를 듣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버지에게 돈 이야기를 꺼낼 때면 입 속에서 수십 번 맴돌다 결국 미루고 미뤄 등교 직전에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셨고, 나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답답하고 싫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재수 시절 그 많은 돈을 지원해 주시며 단 한 번도 힘들다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게 참 신기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음깊이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커다란 산이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무거운 바위가 가득한 아버지. 그 앞에 있으면 너무 커서 위가 보이지 않았고 산그늘만 어둡게 드리웠다. 아버지가 힘겹게 버티며 비바람을 막아주고 쨍쨍한 태양 아래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려고 애쓰는 것을, 그때 아주 조금 알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힘들게 벌어서 보내 주시는 돈이라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주말에 집에 다녀오고 싶었지만, 시간을 아껴야 하고 용돈 7만원에서 왕복 차비 2만원을 빼면 빠듯할 것 같아 참았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조급함과 ‘또 떨어지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으로 마치 절벽 끝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대학에 떨어졌으니 너는 가치가 없어. 너 같은 아이는 이 세상에 쓸모가 없어.’
세상이 나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비판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우울했다. 나를 다그치는 내면의 비판자 소리를 밥 먹듯 매일 받아먹었다. 내 마음에는 점점 그의 자리와 목소리가 커졌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고통스러운 3개월이 지나고 5월 엄마 생신 때 처음 집에 내려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속에서 서러움이 차올랐다. 시내에 들어서 익숙한 건물들을 보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오빠를 보자 눈물이 소리 없이 스르르 떨어졌다.
집에 들어가 내 방에 있는 엄마를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긴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서 엉엉 소리 내며 통곡했다.
“울지 마……. 엄마 마음 아프다.”
엄마는 울고 있는 내 등을 쓸어 주시며 힘없이 말씀하셨다. 그럴수록 나는 엄마에게 더 깊이 고개를 파묻고 더욱 크게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내 모습을 보고 언니 오빠들은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일이야? xx이가 우는 모습 처음 본다.”
“허허, 막내가 집 떠나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언니 오빠들은 한 마디씩 건넸다.
까칠하고 잘난 척 차가웠던 막내는 엄마 앞에서는 그저 응석장이 아이가 되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참고 참았던 울음을 한 시간 동안 쏟아냈다.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서 운 적이 거의 없었고 엉엉 운 것은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이 남아있긴 했지만 울고 나니 시원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혼자 끙끙거리며 무척 힘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했고, 새로운 환경을 만나서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때부터 완고하게 믿고 있던 두껍고 딱딱한 껍질에 금이 갔다. 그 틈 사이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밀고 세상과 소통하며 찐하게 삶을 경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