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뭍과 물
첨벙첨벙.
부러 소리를 내며 얕은 바다를 밟는다. 종아리 높이를 넘지 않는 자그마한 파도가 발목을 적신다. 잠자코 서서 물빛 구경을 한다. 물결 그림자가 내 발등에, 그리고 모래 위에 성긴 그물 모양으로 나타난다. 은하수로 만든 듯이 반짝인다. 발을 살짝 들어 올리면 빛 그물 사이로 물에 흠뻑 젖은 발이 불쑥 나타난다. 그 짧은 사이에 발이 있던 자리에는 소리 소문 없이 물결이 밀려들어 온다.
정오가 막 지났을까. 구월의 초입이어서 피서객은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을 지나오면서 태양은 조금 싱거워졌지만 작은 물결은 여전하다. 이곳은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곳, 나는 섬에 와 있다. 물결이 깨지며 발을 덮는 곳, 발바닥으로 모래의 촉감이 느껴지는 곳, 아무도 내가 이곳에 온 걸 모른다. 육지 언저리에 부속품처럼 끼어 있던 내 몸을 5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바닷물이 틈을 허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든다.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발걸음이 익숙한 장소를 떠나오고 싶었다. 되풀이되어 일상이 되어 버린 크고 작은 역할들을 집 안에 둔 채 문을 잠갔다. 모든 걸 퍼 줄 듯이 배려하는 마음이라든가, 작은 안부를 잊지 않고 챙기는 세심함도 집에 놓고 나왔다. 살아남았으니 무언가 꼭 해내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사명감과 책임 의식까지 함께 두고 왔다. 무엇이든 타인에게 맞추려고 하는 소심한 얼굴의 가면까지 던져 놓고 나왔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일상의 세계는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 당위와 효율로 결속된 곳이었다. ‘이제 일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누구는 집에서도 돈을 번다는데’, ‘가족과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라’,‘피곤하게 뭘 그렇게 해’ … 그 세계는 육중하고 견고했다.
단단한 세계를 훌쩍 건너왔다.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발바닥에 닿는 물의 감촉이 시원하고도 간지럽다. 투명한 물빛이 다가와 발목에 엉긴다. 솜털이 난 강아지가 몸을 비비듯이 부드럽고도 살갑다. 파도로 부서진 작은 물살이 맨살에 닿으며 허물어지다가, 모래 위에 얇은 솜이불처럼 끝을 둥글게 말며 카펫처럼 펼쳐지다가, 화들짝 놀란 듯이 바다로 되돌아가려다가, 모래알 사이사이로 퍼지며 불현듯 납작해지다가 스르르, 이내 흔적 없이 모래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만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모두 소멸한다. 걱정도, 염려도, 집착도, 슬픔도, 결국 무(無)로 돌아간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 다사다난한 세계를 겪으며 나는 어떻게 사라져 갈까.
작은 파도가 복숭아뼈를 훑으며 지나간다. 부서지는 물결이 발목에서 찰랑인다. 물결 아래 펼쳐진 모래톱이 빛을 받아 울렁인다. 이곳은 땅과 물의 중간지대다. 물이 찰랑이니 땅은 아니고, 물이라고 하기에는 땅이 밟히니 그 또한 아니다. 물이 쉴 새 없이 들어오니 시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여백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바다와 뭍의 경계가 시시각각으로 새로 그어진다. 고개를 들어서 먼바다를 보다가, 뭍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바다를 마주하는 일은 여행자의 꿈이고 뭍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안온한 반복을 상기하는 몸짓이다. 시선을 다시 내 발로 가져온다. 부러 물속에 발자국을 낸다. 파도와 물결과 모래에 발의 윤곽이 스러져도, 자꾸만 첨벙거린다. 여백이 가득한 이곳에 두 개의 점이 자꾸만 만들어진다. 쓸모없어 보이는 이 행위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도, 말릴 사람도 없다. 그만둘 이유도 없다. 내가 내 의지를 지닌 채 오롯이 물살과 모래가 발에 닿는 순간을 즐긴다.
솨아-.
다시금 파도가 부서지고 물결이 다가오고 발등이 모래에 파묻혀 간다. 모래 때문에 내 발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인다. 내 존재의 흔적처럼 뿌옇다. 물결이 삶 곳곳에 들이닥치는 사건들처럼 그치지 않는다. 지난한 삶 속에서 나는 나 자신보다 남의 귀와 눈과 말에 주도권을 넘기며 살았다. 나를 지우는 건 보호색을 띠는 동물처럼 세상의 손가락질로부터 안전한 방법이었다. 어떻게든 묵묵히, 동티 나지 않게 숨만 쉬고 사는 게 이 세계를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발을 들고서 바닥을 힘주어 밟자 단단하고 매끈했던 모래톱 표면이 흐트러진다. 두 발로 열심히 여러 개의 구덩이를 만들어 본다. 내가 ‘지금’ 물속에서 발을 들어 올린 뒤, ‘옮긴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땅도 물도 아닌 중간지대의 시공간을 생생히 만끽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의 중심점이 이동한다. 지나간 구덩이를 벗어나 새로 디딜 때마다 세상의 중심이 이동한다. 세계의 원점이 점차 내 현 위치와 맞아떨어져 간다. 내 존재를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건 내 시선과 의지였다. 재차 바닷물이 찰랑대며 다가와 발등 위를 덮어도 나는 계속 발을 꺼내어 새로이 디딘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몸부림이다. 내가 만들어 낸 구덩이는 삶이라는 여백에 내가 만들어내는 흔적이다. 이는 삶이라는 도화지에 난 오점이다. 이는 실수나 실패로도 이름 붙여질 수도 있겠다. 내가 첨벙 대며 만드는 발자국은 결국 견고한 세계에 내놓는 작은 반항이다. 뭍과 물의 경계에서 홀로 자유롭다.
내 무게의 절반을 감당하는 발 하나가 다른 발 하나에게 그 무게를 전가하는 그 틈, 발을 뻗어 다른 곳을 디딜 때마다 물살이 그 틈을 비집어 들어온다. 세계의 부속품으로 소모되어 스러지기에 이 생은 무한하고도 유한하다. 끝을 모르게 길면서도 어떻게든 끝이 존재하므로 짧은 셈이다. 내가 하는 일은 사소하게도, 발을 계속 움직이는 일이다.
‘무엇이든 하자. 그래도 괜찮겠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무게중심이 제자리를 찾는다. 한동안 세계에 눌리어 형태가 희미해졌던 나였다. 중간지대에서 나를 건져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스러지지만 소멸되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희미해진 나를 찾는 방법은 ‘첨벙첨벙’이었다.
빛을 잔뜩 머금어 버린 바닷물의 결이 천 개로, 만 개로 갈라져 흩어진다. 모래톱 속에는 발자국이 남모르게 쌓였다. 고개를 돌려 뭍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제 흔쾌히 돌아갈 시간이다. 빛 그물이 너울거리며 길을 내어 준다.
* 본 작품의 수정본(최종퇴고본)은 금은박 한지 위에 푸르른 글씨로 선보입니다.
- 아트북 라운지 '비플랫폼'에서 100개 한정 제작되는 아티스트북으로 소장할 수 있습니다.
- UE16 언리미티드 에디션(2024.11.15~17)에서 최초 판매 및 대만 북페어(2024.11.22~24) 출품작입니다.
@bplatform
2024 B-PLATFORM LAB ARTIST 선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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