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빈 의자
작은 탁자 하나
위에 놓인 꽃병 하나
마주 보는 의자 한 쌍.
해풍을 맞으며 걷던 길이었다. 해변과 도로의 경계에 만들어진 나지막한 담 위에 누군가가 자리를 펼쳐두었다. 탁자 위에는 하얗고 둥근 수국이 빼곡히 채워진 꽃병이 있었다. 이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노란 의자가, 오른쪽에는 빨간 의자가 놓였다. 어른이 앉기에는 퍽 작아 보였는데 쓰고 남은 목재로 얼렁뚱땅 만들었거나 70~80년대 교실에서 볼 법한 걸상에 색색깔의 페인트를 칠한듯했다. 그 자리 너머에는 그 어느 달력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바다 풍경이 자리했다. 바람은 사납지 않았고 바다는 파랑과 초록빛이 뒤엉켜 빛을 발했다.
잠깐 앉아볼까나. 의자에 잠시 궁둥이를 붙여본다. 의자에 앉기 위해서는 무릎을 구부리고서 궁둥이를 상판 위에 올려야 한다. 넓적다리 위에 올라붙은 이 부분은 신체에서 미묘한 부위 중의 하나다. 몸 가운데 살이 많은 편이며 둥글둥글하다. 둔감하게 생긴 데 비해 속마음을 잘 내보이는 신체 부위랄까. 어떤 이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느냐에 따라 그 자리의 공기는 시공간을 뛰어넘듯 천연덕스럽게 달라진다.
노랑 의자에서 화창한 봄날을 닮은 기억이 스며 나온다. 열 살 즈음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매일 짝꿍의 손을 끌어다가 볼펜으로 낙서했다. 친구는 집에 가서 혼난다고 말하면서도 매번 내게 손을 맡겼다. 사랑과 인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숨 쉬는 공기를 다르게 바꾼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우리의 의자는 칠판을 향해 나란히 놓여있었다.
의자가 놓인 자리에 볕이 비스듬히 들이친다. 마주 보는 의자 사이에 빛의 편차가 생겨난다. 노랑 의자는 더욱 금빛을 발하고 빨강 의자의 다리에는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눈으로 쓸다가 발에서 시선이 멈췄다. 땅과 닿고 있는 의자의 다리 끝이 유독 닳았다. 상처투성이처럼 보이는 맨발이다. 멀끔한 몸체와 다르게 페인트 도장이 벗겨져 있었다. 처음 놓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옮겨진 걸까.
대학 시절 내 의자는 ‘빨강’에 가까운 빛깔이었다. 사랑이 들끓었다. 각자 앉아있던 자리의 간격이 차츰 좁혀져서, 만남이 연인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좋아했다. 내내 학과 CC(캠퍼스 커플)였고 연인과는 시간표까지 맞춰 다녔다. 성인이 되어서 하는 연애는 과일의 맛보다 달았고 짝 없이 거리를 걸을 때면 늘 허리께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최대한 멀리하고 싶었고 한 쌍이란 개념은 언제나 환영했다. 나는 혼자 있기보다는 연인의 품에 있기를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혼자가 되어버리는 날에는 눈꺼풀에 잿빛 장막이 드리워졌다. 그때마다 상대를 향해 놓여있던 의자는 가까이 당겨졌다가 밀쳐지곤 했다.
의자는 사람을 닮았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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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latform
2024 B-PLATFORM LAB ARTIST 선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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