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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섬, 홀로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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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므 Oct 31. 2024

...

_ 구멍돌

  하늘, 바다, 밭, 그리고 돌담이 보인다. 창문 너머에 펼쳐진 풍경 덕에 막힌 줄도 몰랐던 숨이 ‘흐우-’ 하고 날듯이 흩어진다. 도착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집에서 자를 대고 선을 쭉 긋는다고 했을 때 이곳까지의 거리는 500킬로미터 남짓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거무튀튀한 돌, 고개를 돌리는 곳곳마다 구멍 가득한 이것들이 불쑥 엉겨든다. 이 돌을 눈으로 삼키면 바람 맛이 난다.     


  현무암의 한때는 이랬다. 주홍빛이 날름거리던 붉디붉은 마그마였다. 적잖은 시간 숨죽이며 살다가, 펑! 한 번에 지표면까지 뚫고 나왔는데 정신 차려보니 몸이 검게 변했다. 그 몸에 사정없이 새겨진 크고 작은 구멍들은 덤이었다. 어느 날, 섬사람이 돌을 집어 들었다. 땅과 땅의 경계에 돌과 돌을 올렸다. 구멍 난 돌들이 살을 맞대었다. 바람이 칼처럼 찌르고 지나가도, 태풍이 할퀴며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았다. 바람 든 돌은 섬을 지킨다.      


  숙소에서 눈을 뜬 아침이다. 문득 걷고 싶어졌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선다. 산책 삼아 걸어볼까나. 일부러 어제 가보지 않은 작은 골목 쪽으로 들어섰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보였다. 이른 시각이다 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귀 밝은 개들이 소리로 나를 반겼다. 길을 걷다가 뭍으로 옮겨놓은 배를 만났고 당근 캐릭터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벽화도 지났다. 골목 끝에 작은 언덕과 함께 돌담도 얼굴을 내밀었다. 돌담은 내 시선보다 위에 있어서 그 틈으로 하늘이 새어 나왔다. 때마침 구름도 없이 맑았다. 돌과 돌 사이의 틈 사이로 푸르른 하늘빛이 아콰마린 원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의 지대에 와있다. 이끌리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거칠거칠하다. 거뭇거뭇하면서도 잿빛이다. 우주의 먼지를 뭉쳐 만든 듯한 빛깔이다. 블랙홀처럼 암흑을 품었으면서도 함부로 뚫린 듯한 구멍이 볼수록 기괴하다. 지구의 것이 아니라고,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법하다. 몸에 새겨진 제각기의 구멍은 크기가 고르지도 않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멍 하나하나가 세상을 향해 벌린 입처럼 보인다. 속에 쌓아둔 말이 그렇게나 많은 걸까. 무결하고 허여멀겋던 몸뚱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억겁의 정적이 필요했을까그 속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면 분명 수백 가지 이야기가 있을 테지잔뜩 구멍 난 몸으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 구멍은 열다섯 평 남짓한 빌라였고, 대학교 이름이었으며, 서둘러 하늘로 간 친구, 별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던 과거의 나였다. 스페인의 한 해변, 파라솔 아래 식탁에서 고개 한쪽을 들어 올리며 자신감 있게 미소 지었던 단발머리의 그 여자. 몇 년 전의 건강했던 내 사진에 눈을 맞추며 함부로 부러워했다. 소위 독립적이라고 하는 직장 여성의 삶은, 이미 넘겨진 책장처럼 생의 저편으로 넘겨졌다. 나풀대는 종이 인형처럼 타인의 손길을 따라서 펄럭였다. 나 스스로에 대한 존중, 확신, 결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큰 구멍이 생겼다.


  구멍 없는 사람은 없다. 흉터 하나 없이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구멍의 흔적 없이 삶을 살 수는 없다. 그 흔적은 흠일 수도, 오점일 수도, 과오일 수도, 실패나 상실일 수도 있다. 사람은 외따로 아프다. 마음속에 감춘 구멍은 함부로 바깥에 내보일 수 없어서, 그 누구도 서로를 감히 도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잔머리카락들이 허공에 부유한다. 바람이 내 볼을 타고 지나가다 돌담을 발견하고 돌진한다. 돌담 언저리에 있는 이름 모를 풀잎이 목에 힘을 준다. 그리고 그 돌들은, 돌담이 되어버린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내 얼굴을 자꾸 덮는 머리칼을 한쪽으로 매만지며 눈을 부릅떠본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바득바득 하게 울리는데 그들은, 고요하다. 


  사람과 달리 현무암은 구멍을 서로 내보인다. 더군다나 몸을 맞댄다. 구멍 때문에 거칠거칠해진 몸이어서, 이들은 최소한의 면적으로 서로를 붙든다. 느슨하게 맞닿은 몸들이지만 바람이 칼처럼 쑤시고 들어와도 괜찮다. 이들은 각자의 오점을 바람이 통과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어깨를 둥글게 말아서 서로의 몸 사이로도 바람이 지나간다. 거센 바람은 꽉 껴안고 작은 바람은 기꺼이 지날 수 있게 몸을 내어준다. 느슨하고도 가까운 이들이 서로를 지킨다.      


  한때 눈이 아릴 정도로 아름다운 주홍빛을 뿜던 그들, 이제는 암흑을 품은 모습으로 고요하다. 서로의 틈과 흠과 오점을 서로 내보였으므로 별다른 접착 물질 없이도 끈끈하다. 어깨가 스치는 정도의 최소한의 면적으로 충분하다. 구멍이 있지만 구멍이 아니고, 거뭇거뭇하지만 암흑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내려온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구멍은 여전하다. 

  우리가 맞댄 그 몸들 사이로 하늘이 보석처럼 콕콕 박혔다. 

  그 사이로 바람이 수우우-.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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