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내와 결혼하기 전까지 내 인생에 반려견이란 아주 낯선 말이었다. 32년간 집 안에 존재하던 생명체라고는 식물 또는 가족 외에는 없었다. 아내가 10년간 키우던 강아지는 연애할 때부터 종종 아내 집에 놀러 가면 볼 수 있는 특별한 생명체였고 긴 시간 동안 내 인식 속에는 꽤나 불편한 존재였다. 툭하면 짖고, 아무 데나 배설을 하고,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기에 너무나 인간에게 의존적인 이 녀석은 그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에 대한 호감으로 감수해야 할 대상이었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여자 친구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종종 오른쪽 겨드랑이 옆에 파고들어 잠을 자고 있는 녀석이 어느 순간 귀여워 보였다. 나를 보고 짖더니 어느 순간 다가와서 다리를 핥던 처음 그 순간은 약간의 충격이었다. 강아지에게서 보았던 여자 친구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이 나에게도 조금씩 오는기분은나에게 너무 낯설던 경험이었다. 어느 더워지던 초여름 여자 친구와 강아지를 데리고 긴 산책을 하기 위해 개모차를 끌고 나가 한 시간 반가량 공원을 걸은 날이 있었다.내가 하던 일과 내가 보내는 주말의 큰 차이는 그 날 너무 크게 다가왔다.
브랜드 마케팅을 하던 나에게 있어서 주중의 일과는 어느 특정일, 제품과 서비스 론칭을 준비하기 위해 몇 달을 준비하며 그 하루를 위해서 매일을 갈려나가는 게 일상이었다. 소비자 조사와 매출 데이터를 보고 시장을 분석하며, 경쟁사 포지셔닝을 잡고 브랜딩을 제대로 하여 제품 차별화를 하고, 반짝거리는 광고와 화려한 이벤트를 준비하던 게 내 업의 본질이었는데 그와 정반대로 한가로이 시간을 죽이면서 차오르는 낯선 충족감이었다.
그 한가로운 주말, 빛나는 하루를 위해 몇 달을 고생하던 게 당연했던 나는 여자 친구와 이런 의미 없이 충족되는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결혼이라는 것도, 강아지랑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와 같이 살다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고 강아지와 같이 살며 강아지에 대한 애착은 더욱 생겨났다. 자식같이 느껴진다는 아내와 달리 나에게 이 녀석은 아내가 데리고 온 가족이었기에 아들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마치 말 안 듣는 미운 네 살 막내 동생이 생긴 느낌이어서 한없이 귀여워서 계속 뽀뽀를 해주고 싶을 때도 얄미워서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우리 집 강아지는 다행스럽게도 그 무엇도 물지 못하는 착한 강아지 었지만 겁이 많아서 소리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앞집에서는 강아지가 10초 이상 짖을 때마다 컴플레인을 하기에 우리 역시 소음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요크셔테리어라 다행히 털이 많이 빠지지는 않고 얇고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있지만 대소변 교육이 완벽하게 되어있지는 않아서 종종 다른 곳에다 볼 일을 보았다.
아내의 배가 점차 불러오면서 당면한 문제는 아기와 강아지를 어떻게 같이 키울까 하는 고민이었다. 육아와 육견을 함께할 수 있을까? 소음은 두배가 될 것이었고, 강아지의 배설물이 아기에게 닿아 감염이라도 된다면 너무 끔찍할 것 같았다. 아기에게 있어서 조금이나마 문제가 가는 게 싫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과 육아 병행도 힘든데 강아지까지 키우는 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회의적이었으나 아내는 고집스럽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내와 만나면서 아내 주장에 회의적이어도 일단 해보고 나서 안되면 그때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우리 관계와 나의 정신건강에 훨씬 편하다는 걸 느꼈기에 아내의 말을 우선 따라보기로 했다.
강아지와 함께 살 방법을 찾아본다
제도가 보장해주는 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출산휴가는 10일간 유급이며 육아 휴직은 3개월간 월 150만 원씩 아빠에게도 나온다. 일단 100일을 넘기면 아기는 하루에 8끼에서 5끼 미만으로 먹는다. 3시간에 한 번에서 5시간에 한 번으로 바뀌면 할만할 수도 있겠다. 육아휴직을 쓰기로 결정했다. 커리어를 포기하는 만큼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육아와 육견의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이동형 카메라 스탠드를 샀다. 영상 편집도 배웠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아내 출산하기 1달 전 본사에서 한국 지사 철수 결정이 내려져 나는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신생아는 4주간 너무도 연약하기에 강아지의 세균에 위험할 수 있으니 강아지와 떨어져 있어야 하기에 산후조리원을 3주간 끊고 남은 1주간 강아지를 처형 댁에 부탁하였다. 강아지가 잘 가지 않던 컴퓨터방에서 컴퓨터를 빼고 강아지가 계속 있는 안방에 있던 아기 침대를옮겨 컴퓨터방을 아기방으로 바꾸고 모니터링이 가능하게 CCTV를 설치했다. 내일 펜스가 오면 아기방 앞에 설치하여 우선 강아지로부터 아기를 분리시킬 예정이다.
요새 나오는 홈 CCTV는 야간에도 잘보인다
열심히 아기를 키우는 루틴을 학습한 건 강아지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분배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다행스럽게 그 루틴을 만드는 게 효과적이라 아기의 울음 리드타임은 점점 줄어들고 안정적으로 잠을 재우고 있다. 아기가 울어 젖을 물리기 위해 아내를 깨우던 어제와 다르게 새로 숙면 젖병을 구매하여 사용한 오늘 밤은 아내가 잠든 오후 11시부터 현 시각 새벽 5시 25분, 아직 한 번도 아내를 깨우지 않고 있다. CCTV를 설치하여 아기를 재우고 편히 화장실에서 큰일도 해결하고 막간을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강아지가 오기 전이니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른다. 강아지가 내일모레 집에 돌아와야 진짜 시작이다. 오래간만에 다시 강아지를 볼 생각에 기쁜 반면 아기와의 시너지가 어떻게 날지에 대한 불안감은 더 큰 것 같다. 전업 아빠가 투입되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