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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un 15. 2024

원 안에서

2024.6.15.


모자람 없이 상쾌한 5월의 이른 오후.

맑은 햇살이 뭉게구름 사이로 기대어 보송보송해.

엊그제까지만 해도 꽤 더웠다.

아직은 여름보다 봄에 더 가까운 날인데

햇살은 장미 가시처럼 따가웠다.

한 달쯤 앞질러 온 듯한 날씨는

어제 내린 비 덕분에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보슬비보다 촉촉하고 장맛비보다 여린,

무르익은 봄과 다가올 여름을 잇는 건널목 같은 비,

‘이음비’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비는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듯 퇴근 무렵 그쳤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산책을 다녀올까. 마음이 움직이는 날이다.

아끼는 카디건을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얇은 바람에 산들거리는 기분, 참 좋다.

입구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하는

장미들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매년 이맘때쯤 만개하는

향기로운 향연이 올해도 열렸다.

지난주만 해도 살짝 아쉬웠는데

그새 꽃봉오리가 피어올라

꽃잎을 활짝 펼쳐냈다.

어쩜 이렇게 품종도 다양하고

빛깔도 알록달록 오묘할까.

크기도, 모양도, 색감도 가지각색이지만

모두 향긋한 즐거움으로 많은 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고 있었다.


화창한 해돋이공원에는

벌써 사람들이 한가득하다.

오전 일찍부터 나왔나 봐.

삼삼오오 모여 앉은 풍경이 다채롭다.

어떤 가족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치는가 하면

어느 연인들은 돗자리를 깔고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각각

캠핑 의자에 둘러앉아 다과를 즐겼다.

공원 한가운데 꾸민 숲 산책길을 따라

크고 작은 색색의 보금자리들이

도미노처럼 들어섰다.

초록빛 대지 위에

갖가지 색상으로 피어난 들꽃처럼

곳곳에 피어있는 천막들,

그 속에 꽃가루처럼 말간 사람들이

바람 속에 행복을 퍼뜨리고 있다.

아이들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차르륵 퍼지고

기분 좋은 여유가 곳곳에 늘어졌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활기차고 평온한 떠들썩함이 울려 퍼진다.


걸음을 옮겨볼까.

행여나 방해가 될까 봐

나지막한 발길을 모아 본다.

해돋이도서관에 잠깐 들렀다.

상호대차를 신청한 책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어제 받았는데 생각난 김에 대출해야겠다.

곧 손에 쥔 도톰한 한 권,

손때 묻은 표지가 반들반들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이

설렘으로 조금 더 무거워졌다.

2층도 한번 둘러보았다.

주말인데 빈자리를 찾기 힘드네.

각자 다른 책으로 저마다 꿈을 향해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덩달아 힘을 얻는 것 같다.

그냥 나오기는 뭣해서

책장 사이를 거닐며 몇 권을 꺼내 뒤적였다.

도서관에 오면 겸손해진다.

잠깐의 방문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남긴

지식과 지혜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교만은 접어두고 교양을 펼쳐내는

생각의 전당을 나와 보도에 올랐다.

반가운 시설물이 보인다.

꿈꾸는 고래가 맞이하는 고래의 숲.

예전에 올 때는 몰랐는데

고래 분수공에서 물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도 분수였다니!

금방이라도 출렁이며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지느러미를 쓰다듬었다.

진짜 고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자.


조금 걸으니 잔디광장이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무언가 특별히 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여기를 지날 때마다 뭔가 기분이 좋아져.

왜일까.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

사람 없는 널찍한 여백이

시원해 보여서 좋기도 하다.

큰 공과 작은 공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날아다닌다.

하늘 가운데 연이 펄럭이고

라켓과 배트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푸른 잔디 위로 해맑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도 덩달아 웃음 지었다.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에 미로 장미원이 있다.

프랑스식 정원을 담은

아담한 이곳에도 장미향이 가득했다.

미로지만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유유자적 걷다 보면 어느새 둘러볼 수 있다.

집에 이만한 정원을

꾸며놓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제 음악분수에 도착했다.

여러 높낮이의 포물선과 물기둥이

몰려든 아이들을 씻겨내느라 쉴 틈이 없다.

햇빛이 물방울에 튀어 금빛 은빛으로 반짝인다.

왁자지껄 웃음소리는 더 맑게 반짝인다.

꾸밈없고 걱정 없는 뜀박질이 이어진다.

나도 뛰어들고 싶겠지만 참겠어.

갈아입을 옷이 없단다.

사실 이건 핑계인 듯해.

이제는 옅어져 버린

동심만큼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촉촉한 아이들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풍경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담아 간직하고픈 날이다.

산책 나오길 잘했다.


걷다 보니 놀이터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태평양으로 떠날 듯한

배 모양 놀이 시설이

꼬마 해적들을 품고 아장거렸다.

흰 파도 거품을 닮은 모래사장은

설탕만큼 부드러웠다.

아이들은 깃털 같은 손으로

모래를 쌓고, 나르고, 흩뿌리며 깔깔거렸다.

모래밭은 바다처럼 물결치며 계속 출렁거렸다.

한쪽에서는 어린이들이

나무막대로 땅을 파고 집도 지었다.

그림 그리기도 한창이다.

별, 세모, 네모, 동그라미 ….

그들은 다양한 모양을 들락거리며

추억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만들었다.

길 가던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가는 나뭇가지를 쥔 왼팔을 쭉 펴서

컴퍼스처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래 알갱이가 사그락사그락

작은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선이 너무 흐린 듯했을까.

더 힘을 주다가 나뭇가지가 꺾여버렸다.

아이는 다시 일어나 이번엔 조금 더 굵은 가지로

선을 그어나갔고 곧 동그라미를 다 그렸다.

선을 그을 때는 매끈했는데

원 밖에 나와서 보니 엉성함이 묻어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 넓은 공원에서, 하나의 작은 세상,

네가 중심이었던

완결된 무언가를 이루었으니까.

원 안에서 바라본 바깥은

크고 막연해 보였는데

원 밖에서 마주한 바깥은

이미 바깥이 아닐 테니까.

예전에는 원 안이 전부이고 완벽해 보였는데

나와보니 그곳은 단지 작은 경계였고

과정이었으며 성장통이었다.

그 아이는 원 안팎을 폴짝거리다가

두 발로 테두리를 조금씩 지워나갔다.

반쯤 곡선을 지우고 다시 원을 둘러보았다.

닫혀 있던 영역이 열리고

둥근 곡면에 내가 아니었던 것들을 담아내었다.

“이제는 이렇게 마음을 열고 살아야지.”

그 한마디가

고래 분수대에서 뿜어 오르는 물줄기처럼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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