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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un 16. 2024

깨진 약속에 대해 써라

2024.6.16.


얼굴에 묻은 거미줄처럼

끈적거리는 불편함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편함은 불안감이 되었다.

작고 짧아질수록

높은음이 나는 악기처럼,

현재와 그 사람과의 만남의 간격이

좁혀지면서 P의 마음은

더 어수선해졌다.

발바닥을 땅에 비비고

손바닥을 서로 문질렀다.

시계는 느림보다.

답답하네, 너무 천천히 가.

P는 불안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용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초조함이 현실이 될 상황이,

그 상황을 마주할 자신을

원치 않을 뿐이었다.

바람에 펄럭이며 동시에

멈춰있기를 바라는 깃발,

그런 깃발이 있을까.

있을 수 있을까.


시계는 5분 전이다.

그 사람이 올까.

하늘을 향한 오르막길은

그 너머 풍경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정상에 서면 내리막길이지.

내가 바란 그림, 그게 없다면?

다시 내려가야 하나?

또 올라올 수 있을까?

그 꼭대기에 흔들리지 않는

깃발을 꽂을 수 있을까.

뭘 볼 수 있을까.

하, 고지에 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처럼

초침과 분침, 그리고 시침이

힘겹게 똑딱거렸다.

P는 고개를 들었다.

그림이 없다, 그 사람도 없다.

그 사람은 늦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없다, 아, 그런 걸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소나기가 올 거란 예보는 틀렸다.

구름이 점점 흐려지기는 하네.

푹푹한 공기가 코를 들락거렸다.

머릿속이 축축해졌다.

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치우다

손이 따끔해지듯,

뜨뜻미지근한 쇠 냄새가

가슴을 붉게 적시는 것 같아.

젖은 곳은 너덜거려 구멍이 나지.

바람이 새는 것 같네.

서늘하게 긁는 알싸함,

피하고 싶었는데 피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부재도 피할 수 없는 걸까.

잠깐이라도 봤으면 했는데.

샵과 플랫을 오가다 도돌이표에 걸린

음률처럼 마음이 헛돌았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커터칼에 속을 드러낸 택배상자처럼

무안해졌다.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마음도 다 한 것일까.


5분이 10분이 되고 1시간이 되었다.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안 올 거다.

오지 않았으니까.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여기에도, 내 마음에도.

그래도 내 마음엔

아직 네가 남아있는데.

다시 볼 수 있을까, 너란 사람.


깨진 약속에 대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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