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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2024.6.21.

by 친절한 James


유혹의 빛깔을 세워 둔 작은 서랍장.

기분 따라, 특별한 약속 때마다

그녀는 여기에서 그날 쓸 매니큐어를 골랐다.

보이지 않는 실로 만물을 다스린다는

운명의 여신처럼, 그녀는 마음에 와닿는

선택의 끈을 손끝으로 튕기며

서랍장 문을 열었다.

짙은 밤갈색 빈티지 서랍이 열리며

뽀얀 속살 속 진주처럼

매니큐어 병들이 반짝였다.

대부분 밝고 화사한 색, 특히

매혹적인 다홍빛과

상큼한 연분홍빛이 눈에 띈다.

달콤한 주황빛과 시원한 하늘빛도

종종 사용했고 은은한 금빛도

노을 햇살처럼 눈부시다.


"어떤 걸 바를까?"

사랑스럽게 서랍장을 훑던 눈길이

맨 구석 작고 둥근 유리병에 닿았다.

마법에 걸린 백조의 깃털처럼

새하얀 빛깔. 언제 샀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네.

익숙하지 않은 브랜드,

선물 받았나?

뚜껑 열기가 쉽지 않았다.

새것 같아. 어디서 난 걸까.

한여름밤의 꿈처럼 아련한 기분.

이걸 한 번 써보자.

알싸한 휘발성 향기가

슬며시 코에 베어 들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 장미향인가.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서늘하면서 달짝해.

봄 산책길에서 가끔 풍기던 그런 느낌.

인동덩굴 꽃향기 같았다. 그래, 비슷해.

이 매니큐어를 바르면 백조가 끄는

마차를 탄 왕자님이 찾아올 것 같다.

그 사랑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마시멜로보다 부드럽고

우유보다 딱딱한,

고체와 액체 그 사이 어디쯤엔가의

감촉처럼 극단으로 끝나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이 찾아와 주길,

그래서 내 삶의 주름진 슬픔을

덮어주기를 그녀는 네일브러시를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발림성이 좋은 것 같아.

접어둔 커튼처럼 잔물결이 일었던

왼손 엄지손톱이 쨍하게 빛났다.

그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먹음직스러운 컬러에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다.

오늘 하루는 미끄러지듯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 같은데.

보물을 찾은 것 같다.

왜 이걸 지금껏 안 썼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 몰래 가져다 놓은 건 아닐까.

백조 탄 왕자님이? 백조 깃털로 쓴

편지라도 같이 주시지 그랬어.


어느덧 열 손가락은

첫눈 내린 앞뜰처럼 사근거렸다.

기분이 좋아지네.

탑코트를 바를까 말까.

지금 색상도 좋은데.

이 느낌을 더 오래 유지하고픈 마음과

이 느낌을 다른 재질과 섞고 싶지 않은

마음이 흙탕물처럼 뒤엉켰다.

베이스코트는 발랐으니 건너뛸까.

아니야, 그래도 탑코트를 해야지.

그녀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그녀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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