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절한 James Jun 23. 2024

이발에 대해 써라

2024.6.23.


시간 속에 있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시간의 지남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재미있는 공연이나 전시를 볼 때도,

단잠에 빠졌다가 화들짝 눈 뜰 때도 그렇다.


수염도 그렇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란다.

나는 수염이 빨리 자라는 편이라

하루만 면도하지 않아도 티가 팍팍 난다.

한 달만 제대로 기르면 산속 도인이 될 듯.

한번 마음먹고 도전해 볼까.


얼굴 아래에서 자라는 수염처럼

머리 위 두상에서는 머리털이 자란다.

수염보다는 기색이 좀 덜하지만

훌쩍 흘러간 한 달 너머의 시간이

어느덧 머리카락에 흩뿌려 있다.

하루 이틀은 잘 모르겠는데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그동안 먹고 마신 게

여기에도 좀 들어있겠지.

바람결을 머금은 모발이

귓등에 슬며시 찰랑거리고

머리 말리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면

이발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사그락사그락 가위질 소리를

눈 감고 들을 순간이다.

단골집에 예약할 시기다.

이발 예약은 보통 주말에 잡는다.

집시처럼 여러 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다.


이젠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면 끝.

알아서 알맞게 척척, 단골의 매력이지.

싹둑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연결된

생체조직이 분리됐다.

영양공급과 세포분열로 성장하던

흑발 뭉치가 이젠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더 이상의 원조가 없는 단백질 섬유.

옛날에는 활시위로 쓰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가발 재료로도 사용되는 터럭.

라푼젤은 이발을 했을까.

이발비는 아꼈을 것 같은데.

물가가 다 오르는데, 머리 자라는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으면 괜찮을 듯해.

그럼 이발하러 두 번 올 걸 한 번만 와도 되니까.

아, 이제 머리 감을 시간이란다.

숲 속으로 숨은 패잔병처럼

두피에 숨어 있던 잔머리카락들도

하수구로 씻겨 내려갔다.

드라이까지 끝내면

내 몸에 남은 두발과 떠나간 모발이

확연히 구분된다.

내 몸에 있으면 내 것이고

내 몸을 떠나면 내 것이 아닐까.

내 마음에 있으면 내 것이고

내 마음을 떠나면 남의 것일까.

곁에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

그 사이를 가르는 칼날, 그리고 헤어짐.


이제 계산하고 나올 때다.

페이가 편하다.

지폐 없는 결제,

실물이 없어도 돈은 돌고 돈다.

떠나간 돈도 잘려간 머리카락처럼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안녕.


이발에 대해 써라


이전 15화 주말에 비가 내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