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4.
"자, 이제 일어나 볼까."
C는 평의자에 얹었던 몸을 일으켰다.
흰 바둑돌 같기도 하고
손질한 양송이버섯 같기도 한 자리에 앉아
맞은편 돌담을 한참 바라보다가
슬슬 걷기로 했다.
이만하면 충분해.
C는 낙엽이 흐드러진
덕수궁 돌담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빨리 걷고 싶진 않았다.
일정 없는 오늘을
여유로이 채우고 싶었고
M이 없는 지금을
추억으로 메우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첫 데이트를 했던 이 길,
같이 미술관도 가고
분식도 사 먹던 그날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버스킹이네. C는 가로수에 기대
몇 곡을 듣고 연주자의 케이스에
작은 지폐 한 장을 떨구었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의 두 번째이자
너 없이 처음 떠난 해외여행 때도
바이올린 버스킹을 만났지.
바삭한 6월의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마주한 현악의 선율, 참 좋았는데.
가이드 말이, 가우디가 여기에
도시 공동체를 만들려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원으로 남았지만
미완의 역작도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놀라움을 주고 있다고 하네.
그건 그런 것 같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여긴 신기한 게 참 많다.
C는 구름다리를 받치는
파도동굴에 들어섰다.
비스듬한 기둥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며
지나간 세월을 무던히 견디고 있었다.
이런 걸 곡선미 또는 사선미라고 불러도 되겠지.
아프고 힘들지만 나도 너처럼 굽이굽이
감정의 풍파를 그저 지나오면 되는 걸까.
C가 자리를 옮기자 알로록달로록한
형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타일이나 유리, 세라믹을 깨뜨려
그 조각들로 꾸미는 트렌카디스 기법이래.
도마뱀 분수나 긴 벤치에도 모자이크가 가득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색색의 무리들,
다른 듯 닮은 짝꿍들의 합창과 놀이.
C는 자신의 발길을 붙잡은,
때로는 우아하고
때로는 익살스러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감탄 속 차오르는 슬픔에
벽들은 눈물의 색깔로 번졌다.
노란 잎사귀들이
너의 숨결 같은 바람에
꿈결처럼 내려앉았다.
정동길의 단정한 돌담도,
구엘공원의 자유로운 모자이크도
각각 보기 좋고 아름답구나.
너와 함께 했던 시절도
너를 볼 수 없는 시간도
그립고 슬프고 감사하네.
여기 오기 전에
광장의 큰 서점에서 책을 봤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해서든 견딘다고.
니체가 말했데.
이번 주말에는
네가 잠든 수목장에 다녀와야지.
그리고 내가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더 들려줄게. 며칠 뒤에 보자.
나의 사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