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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an 05. 2024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마크 스트랜드의 작품에서

2024.1.5.


"⋯"

말이 없다.

그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잡던 손도 놓은 채로.

F가 두 걸음쯤 앞서 가고

T는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산책하던 공원이 아닌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완충녹지공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양옆으로 4차선 도로를 끼고 그 사이에

길게 드리운 폭 10여 미터의 수풀길.

차도 사이에 섬처럼 떨어진 작은 공간,

그 속에서 T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고

울렁이는 마음을 붙잡으려 애썼다.

몸이 나아가는 건지

풍경이 뒤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F의 뒤꿈치만 뒤따를 뿐이었다.


불과 10여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며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둘은 다정했고 웃고 있었다.

발단은 한 책이었다.

두 사람은 책 읽기를 좋아해

서로 읽은 내용을 자주 이야기했다.

T는 오전에 『사랑을 담아』를 읽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려는 남편과 곁에서 지켜보며

그를 돕는 아내의 이야기다.

T의 설명을 듣던 F가 질문을 했다.

"그럼 당신은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나? 나는... 당신 선택을 존중할 거야."

"아니, 그럼 내가 죽든지 말든지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의견을 충분히 듣고..."

"병들고 힘없으면 빨리 죽길 바라는 거냐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책은 괜히 읽었나.

말하지 말걸 그랬나.

내 뜻은 그게 아닌데.

마음을 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어색한 고요.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실로 많다.

수많은 감정들이,

후회와 고민과 걱정과 슬픔,

그리고 불안한 불편의 쓰나미.

말문이 막히고 생각이 멈추는

걷는 좀비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하루를 안 넘기고 오해를 풀었다.

사랑한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

그 사람의 고민과 선택, 그리고 결정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슬픔과

아픔을 남기려는 애씀이란 걸,

애정을 담아 이해하는 것임을

공감할 수 있었기에.


다음날 저녁 두 사람은

익숙한 공원을 거닐었다.

"C 있잖아, 응급의학과에서 일하는 친구.

오늘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어제 책 이야기를 했어.

그러니까 C도 배우자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거야.

물론 당신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잘 알지.

그런데 어제는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헤어짐에 대한 슬픔에 그만 말이 세게 나간 것 같네."

F는 말을 이어갔다.

"C가 영화를 하나 추천해 줬어.

<밀리언달러 베이비>라고.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모든 게 당연한 것 같고 영원할 것 같아도

그런 건, 글쎄...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주어진 나날들,

그렇기에 함께하는 순간을

더 감사하고 소중히 보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침묵 속에서 떠오른 단상 하나.


그들은 산책을 마치고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집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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