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
그날도 평소와 비슷했다.
새벽 4시, R은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켰다.
스트레칭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버스 첫 차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R은 정류장 벤치에 앉아
신발끈을 동여 메었다.
이번엔 꼭 성공하겠어.
R은 아직 어둠이 짙게 내린
오르막길을 내디뎠다.
잠에 잠겼던 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잊을만하면 빛을 건네는 가로등을
동료 삼아 짙은 밤향기의 중심으로
들어서다 보니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오랜 친구처럼 반갑다.
첫 번째 포인트에 도달했군.
맞은편 샛길 끝에는 등대처럼 불을 밝힌
암굴이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소원을 먹고
희망의 씨앗을 틔우려나 봐.
R은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산길은 물소리를 잠재우고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색하고 불편했다.
R은 보이지 않는 길 저편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의 압박감을 느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자석의 서로 같은 극성이 밀어내듯
멀리서부터 어떤 존재감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R은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뻗은 암흑을 응시했다.
내가 예민한 건가. 다시 한 발 떼는데
그만 가슴이 얼어붙어버렸다.
방송에서 듣던 합성음이 아니라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짐승 소리,
듣는 이의 몸과 마음을
두려움으로 짓이기는 울부짖음.
잡혀 먹힐 것 같은 공포란 이런 걸까.
어디로 가야 하나.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다.
R은 혼란스럽고 눈앞이 아득했다.
아니야, 정신 차려야지.
R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을 이어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다가
순간, 푸다닥, 자동차만 한 검은 형체가
낙엽 쌓인 비탈길을 뛰어올라
더 깊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R은 머리가 핑 돌며 주저앉았다.
몇 차례 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비봉 등정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또 그것을 마주칠 수도 있으니.
R은 옆길에 있는 사찰로 몸을 옮겼다.
입이 안 다물어진다. 아직도 손이 떨리네.
문을 여니 새벽 불공 시간인가 보다.
어찌할지 몰라 마룻바닥에 앉아있었다.
비구니스님이 어쩐 일인지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하니 이 근처에는
야생 멧돼지가 있어서 위험할 수 있다고,
그럴 땐 큰 나무나 바위를 등지면 된다고 했다.
녀석들은 후각이 좋지만 시력이 나빠
자기보다 덩치가 커 보이면 안 덤빈다고 한다.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일 듯.
먼 곳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R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류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