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시간,

바람앞에 다시서다.

by 꿈의복지사

다시 돌아온 시간, 바람앞에 다시서다.


배의 선실 안, 홀로 남겨진 시간.
적막함만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적막을 깨뜨리고 싶어,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 갑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망망대해 위, 서쪽 하늘로 해가 가라앉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바다 위로 길게 번져, 마치 수평선까지 피어난 불꽃 같았다.

나는 그곳에 서서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가 지나가며 내는 깊고 묵직한 엔진음만이 정적을 가르며 흘렀다.

아직 저 멀리 울릉도의 산자락이 보였다.

‘수없이 보아온 풍경인데, 오늘따라 색이 다르다.’
겨울 바람이 볼을 스치고, 염분 섞인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건 단순한 이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살아낸 날들이, 그 뜨겁고 거칠었던 순간들이,

저 풍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나를 뜨겁게 달군 여름이 있었다.

그 여름의 한가운데서 흘렀던 땀방울, 흙먼지와 함께 뒤섞인 소금기,

그리고 밤까지 이어진 노동의 시간. 그 속에서 나는 노동이 주는 참된 무게를 배웠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세우는 과정이었다.

해질녘, 땀에 젖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퇴근하던 날이면,

이웃이 된 형·동생들과 모여 앉았다. 시원한 소주잔이 돌고,

웃음과 한숨이 뒤섞인 대화가 밤공기에 묻어났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단함을 건배로 씻어냈고,

잔 속에는 알코올뿐 아니라 위로도 흘렀다.


그리고 혼자가 되는 시간도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해안을 따라 홀로 걸었다.

검은 바위 위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묘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다는 감각,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잠시 회상에 잠겨 있다 돌아온 사이 배는 점점 더 먼 바다로 나아간다.

울릉도의 봉우리는 작은 그림처럼 희미해진다.

그 속에 나의 여름, 나의 땀, 나의 웃음과 고독을 함께 남겨둔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언제나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살아 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먼 바다에 하얀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더니, 어느새 장관을 이뤘다.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이었다.

마치 새로운 곳을 향에 나아가는 나의 길 위에

“이제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밝은 길만 걸어가라”는 메시지를 건네는 듯했다.


배는 꼬박 14시간을 달려 포항 선착장에 닿았다.

여명이 아직 남아 있는 새벽 6시, 입항 소리가 울리고 차량 출입이 허락됐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 입사하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울릉도 직장의 배려 덕에, 새로운 시작 전에 마음을 다잡을 시간을 선물받았다.

포항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부모님 계신 고향집이었다.

울릉도에서는 일주도로 하나만 달렸던 내가, 오랜만에 육지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양옆으로 스쳐가는 많은 차들. 익숙해야 할 풍경이었지만, 내겐 새로움 그 자체였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리신 것이다.

식탁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왔나…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자.”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반가움과 안도감은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내 그릇에 반찬을 더 올려주셨다. 아무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사랑이었다.


며칠 뒤, 이십 년 지기 친구를 만났다.

내 새 출발과 그의 새로운 발령을 축하하며, 오래된 친구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대화를 했다. 우리는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직장에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신생 노인복지관은 바쁘게 돌아갔다.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만 벌다 죽고 싶지 않아 떠났던 그 길,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남들의 시선과 기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선택하고 내가 나를 움직이는 삶.

울릉도에서 배운 고요, 사람들 속에서 느낀 연대,

바다 위에서 확인한 단단함이 내 삶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 사른 것은 비슷했다.
이곳에도 예상치 못한 갈등이 있었고,
누군가의 시선은 여전히 날 흔들었다.
순탄할 줄 알았던 새 출발에 작은 균열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병환이 다시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연락 속에 들려온 말은 ‘대학병원 중환자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복지관의 복잡한 일정과 아버지의 병실이 겹쳐진 채,
나는 또 한 번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다시, 나를 선택해야 하는 또 찾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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