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에게

흔들리는 초상

by 꿈의복지사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여전히 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조금씩 바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전화는 여전했다.
“춥지 않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
그 짧은 말들 사이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았다.
자주 표현하진 않지만, 문득문득 전해지는 그리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아버지의 ‘기다림’은 어떤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그리고 어머니.
자식 걱정에 밤잠 설치는 그 마음을 나는 어릴 때도, 지금도 늘 짐작으로만 헤아렸다.
목소리는 늘 밝았지만, 그 안에 담긴 허전함을 나는 감히 다 꿰뚫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나를 조용히 붙잡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타인의 혼에서 행복을 찾고 싶지 않다.”

그때, 오래전에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혼이여, 너는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네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의 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


나는 깨달았다.
울릉도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도피가 아니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의 끝에서 나는 또 다른 선택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겨울, 옆방 아저씨도 떠났다.
관광시즌이 끝난 섬은 더욱 조용해졌고, 나는 홀로 남겨져 있었다.
쓸쓸했다. 동시에 명확해졌다. 이제는 떠날 때라는 것을.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나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내가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면,
내가 살아온 삶의 이유이자 중심은 결국 사회복지였다.’
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지금 내게 가장 진실한 대답일지도 몰랐다.

무작정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내게 말하듯 결심했다.
“백수로 나갈 수는 없어. 준비하자.”

곧 취업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눈에 띄는 채용공고 하나가 있었다.
망설이다 휴가를 내고 육지로 향했다.
면접은 낯설었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며칠 뒤, ‘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입사 일자를 한 달 뒤로 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울릉도 생활의 마무리가 필요했다.
나는 이 섬에서 1년을 살았다.
그 시간 동안 함께했던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바람과 파도, 고요와 외로움까지도
모두 내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작별할까.
그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헤어짐이 늘 그러하듯, 무언가를 잃는 동시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떠나기 전, 나는 뜨겁게 타올랐던 여름을 떠올렸다.
팔을 걷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던 날들.
태양 아래 허리를 굽히고 동료들과 흘린 땀,
나는 처음으로 ‘노동’이 땀의 무게라는 걸 알았다.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는 사이,
내 마음에도 무언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루가 끝나면 우리는 그 땀을 쓰디쓴 소주 한 잔으로 씻어냈다.
말없이 잔을 기울이며 누군가는 가족 이야기를 꺼내고,
누군가는 내일의 바람과 파도를 이야기했다.
그 밤들이 내게 가르쳐준 건,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삶은 견디는 것 이상으로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혼자 바닷가를 걷기도 했다.
바람은 거셌지만,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해안길에서,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잘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고요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다정하게 대답하곤 했다.
“응, 너 잘 살고 있어.”

그렇게 섬 생활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떠나는 날,
짐을 자가용에 가득 실었다.
짧지 않았던 시간들이 상자 하나하나에 담겼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인사를 건넸고,
고향 어머니 같은 울릉도 우리 어머니의 따뜻한 마지막 밥상을 받았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내가 맛있게 먹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포장해서 건네주셨다.
“가서도 잘 살아.”

그 한마디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차에 올라 사동항으로 향했다.

방파제를 마지막으로 걸었다.
그곳에서 수없이 바다를 바라봤고, 수없이 나를 되돌아봤다.
오늘, 그 바다가 유난히 잔잔했다.
마치 “잘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후 4시.
나는 화물선에 올랐다.
배는 천천히 부두를 벗어났고, 갑판 위에서 나는 섬을 되돌아 보고 있었다.

섬은 점점 멀어졌다.

바다는 고요했고, 섬은 말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울릉도여, 안녕.
뜨거웠던 나의 여름,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 이 바다위에 설 날이 온다면,
나는 오늘의 나를 기억하며, 조금 더 단단해진 나로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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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 울릉도 마지막 지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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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 오징어 잡이 배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출(육지에 다다를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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