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울릉도로 돌아온 나는, 더는 예전과 같은 일상을 살 수 없었다. 벌초 아르바이트로 분주했던 가을은 어느새 지나가고, 울긋불긋 타오르던 산자락은 점점 색을 잃어갔다. 태풍이 지나간 뒤 섬은 더 단단해졌지만, 내 마음은 그만큼 무너져 있었다. 그날 이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모든 것이 잠시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섬의 바람은 유난히 거칠었고, 그 바람 속에서 나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버거웠다.
일주도로에는 태풍에 떨어진 바위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도로는 통제되었다. 그 장면은 익숙했던 풍경이 아니라, 마치 내 안의 혼란을 외부로 드러낸 것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을 떼는 일조차 몸으로 버텨내야 했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삶이란, 때로는 바람 앞에 서는 일이라는 것을.
섬은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태풍이 완전히 물러간 어느 날, 나는 방파제 위에 올라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태풍으로 뒤섞였던 바다는 오히려 더 푸르게 빛났다. 시퍼런 물빛 위로 햇살이 내려앉으며, 섬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삶의 중심이 조금 어긋난 듯한 그 틀어짐 속에서 나는 방향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아버지였다. 장례 이후 아버지는 전보다 훨씬 자주 전화를 걸어오셨다. 건강을 걱정하기보다는, 어딘가 허전한 듯한 말투로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셨다. “밥은 먹었나.” “밖에 날씨는 어떠냐.” 평범한 질문들이었지만, 그 말 너머로 전해지는 감정은 또렷했다. 가장 큰 기둥을 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흔들림은 곧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즈음부터 나는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내가 왜 이 섬에 있는지, 지금 이 길이 옳은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붙잡았다.
관광객이 사라진 섬의 거리에는 고요함만이 남았고, 시간마저 한 걸음 느려진 듯 섬은 또 다른 계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요는 점점 짙어졌고, 내 안의 고요 또한 깊어졌다. 그런데 그 고요는 평온함이 아니었다. 불안이었다.
밤이면 술에 기대는 날이 늘어갔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몸은 가만히 있지 못했고,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눌러보려 애썼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처음엔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 시간이 하루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맑은 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잠들기 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이게 맞는 걸까, 지금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그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대신 방 안을 채운 건 불빛이 아닌 낯선 침묵뿐이었다.
섬의 겨울은 세상의 다른 겨울보다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조금 더 깊게 스며들었다. 가을 끝자락에 머물던 내 마음도 함께 얼어붙어 갔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지만, 뭔가가 분명히 달라졌고, 그 달라진 틈 사이로 나는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번 통화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목소리에 단단함이 묻어 있었고, 망설임 없이 말끝이 닿았다.
“올해 겨울은 좀 춥겠더라.”
그 짧은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 한가운데에 박혔다. 그 말 너머로 나는 무언가를 예감했다. 다가오는 변화. 그리고 그 변화 앞에서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를 예고 같은... 나는 그렇게 또 한 계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말의 온도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오래도록 남았다. 말끝의 단단함은 단순히 날씨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우리도 이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들렸다.
그 순간, 오래 미뤄두었던 질문들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의 삶은 내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겨울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밖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마음속에는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쩌면, 다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섬에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선택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다시 일어서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