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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고은 Aug 14. 2024

튼튼한 동아줄

스터디원을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행운

스터디원은 나까지 총 네 명이었다.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임용고시 공부를 오래 했고, 기간제교사나 과외, 학원강사로 일하며 생계나 용돈을 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어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터디 조장 언니는 리더답게 방향성을 잘 잡아주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을 제기하고 명쾌하게 답을 찾아 나가기 전문가인 애경 언니. 애경 언니는 우리 중 유일하게 기혼자였고, 반포 일대에서 고액 국어 과외를 하는 '쓰앵님'이기도 했다.


언니는 늘 고3 모의고사를 풀었던 터라 문법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애경 언니는 과외로 일반 회사원의 월급정도는 버는 것 같았지만 평생소원인,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와 비슷했다.


또 한 명은 우리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영미 언니. 대학교에서 석사로 문학을 전공한 영미 언니는 본가가 전라도인데 그 지역에서 사교육 없이 공부를 꽤나 잘해서 서울로 유학을 온 케이스였다.


하지만 유학생답지 않게 매우 검소하고 소탈하며 사투리 억양이 참 푸근했던 언니였다. 언니는 대학에서 조교 일도 하고 과외도 하면서 생활을 했다. 영미 언니는 석사 출신답게 심도 있게 문학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세 살 정도 나이가 많았던 해경 언니는 마르고 야무진 체구에 동안 얼굴이었지만 모든 분야에서 깊이감 있는 지식을 자랑하는 정통(?) 사범대 출신이었다.


다른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기간제와 학원 강사를 병행하며 임용고시생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중에서 임용고사 응시 횟수가 가장 많아서 수험생활이 지칠 법도 한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


진지한 표정에 학생들이 쓰는 유행어를 맛깔나게 써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능력자였다. 해경언니는 기간제 교사 경험이 많아 학교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다양하게 들려주었다.


임용고시는 초수생 때 멋모르고 붙는 거 아니면 N수생같이 장수생으로 접어드는 사람이 참 많았다.

아무래도 쟁쟁한 경쟁자와 제한된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하기에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그날의 운으로 좌지우지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리바리 어느 것 하나도 전문적이지 않았던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세 사람, 아니 세 명의 은인을 만난 것이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스터디에서 시작한 공부를 기점으로 눈과 머리가 틔었기 때문이다.


그 공부 모임에서 공부 방향을 잡았고, 공부 방법을 배웠고, 힘든 수험생활을 언니들과 함께 나누고 위로받았다.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스터디 모임은 오후 4시에 끝났다.


교과론과 문법, 문학을 아우르며 토의와 질의응답 형식으로 진행됐다. 물론 나는 아는 것이 많이 없어서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언니들의 대화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귀동냥을 하며 그야말로 국어 임용고시가 무엇인지 점차 감을 잡아 나갔다.


스터디 모임에 누가 되기 싫어서 스터디 공부 분량을 무조건 소화해 나기 위해 평일에는 독서실과 도서관에서 온종일 공부를 했다.


그런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어떤 느낌인지 알 것만 같았다.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스톱워치로 순수 공부시간을 10시간으로 정해놓고, 화장실 가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도 빼가며 순수 공부시간을 기록했다. 고3 때도 쓰지 않았던 스터디 플래너를 이때 쓰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수험 생활에서 얻은 공부 방법과 실패 경험은 훗날 학생들이 자기주도학습을 하도록 도와주는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히려 초수에 시험을 붙지 않았던 것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나에게 이득이 되었던 셈이다. '공부 잘하는 선생님'보다 '경험 많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고, 그들에게 더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사실,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전혀 모르던 때의 무료함과 막막함이 가장 두려웠는데, 이제는 해야 할 공부가 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나는 언니들이 언급했던 책을 구해 부지런히 읽고 노트에 정리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애초부터 나 같은 애송이(?)는 경쟁상대가 아니었던 것인지, 언니들은 개인 강습해 주 듯이 내가 잘 이해를 못 하는 부분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부족한 강의는 직강 대신에 인터넷 강의로 대체했고, 언니들 덕분에 공부 방향을 잡으며 책을 보고 이해하고 암기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나에게도 생겼다.


언니들 덕분이었다.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았다.  임용고시에 최종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이 시절, 귀인을 만나서였다.


우리는 그 해 임용고시를 치렀고, 그 뒤로도 몇 번 더 시험을 쳤는데,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넷 중에서 두 명만 현재 교사가 되었고 나머지 두 명은 다른 일을 한다.


인생에서 고마운 사람 BEST 5 안에 드는 스터디 언니들에게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어받아, 내가 최종 면접 때 면접관들에게 했던 마지막 말처럼,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사"가 되겠노라 다짐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이 뜸해졌지만, 나의 튼튼한 동아줄이었던 언니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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