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May 12. 2024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하기

발리한달살기 4주차에 접어들며

이제 발리를 떠날 날이 다가왔다. 비자 만료를 일주일도 안 남기고, 변경 가능하니까 대충 예매해 둔 비행기 시간을 확정해야 한다. 아득히 멀 것 같았던 그날이 훌쩍 코앞으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지난 시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한 달 살기를 떠난 이유는 회복을 위함이었다. 해야 할 것들이 가득 쌓인 한국에서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렸다.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살다 간 완전히 고갈되어서 앞으로 그 어떤 것도 열심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도피성 여행을 선택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좀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나아졌다!


우선 가장 직접적으로, 놀고먹기만 하면서 인생이 참 즐겁다^o^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내 문제 중 하나는 별다른 금융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직장인들은 월급을 보고 버틴다는데, 물욕이 크게 없어서 큼직한 것들을 사지 않는 나로서는 체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아끼는 편은 아닌 나는 오직 먹는 데에만 돈을 펑펑 써서 남는 것 없이 엥겔지수만 드럽게 높았다. 엥겔지수가 높을수록 빈곤하다던데, 그래서 내 영혼이 그렇게 빈곤했나. 이번 여행 기간 동안은 더더욱 정신 나간 것처럼 척추반사로 소비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 문득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런 한달살이도 해보는구나! 언젠가 또다시 이렇게 놀고먹는 삶을 즐기려면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지 일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내 노동의 대가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애사심도 조금 생겼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한테 휴직하고 여행을 온 거라 말하니까, 다들 “헐 좋은 회사네~!” 했다. 오…?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나 자신은 잘 모른다.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했는데, 그래도 좋은 회사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 동기가 휴직 끝나고 돌아와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제일 스트레스가 심하던 시기에는 그냥 선퇴사 후수습을 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쉬고 나니까, 확실히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나한테 안 맞는 직무 자체는 바꾸고 싶지만, 회사와는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좀 해보았다.


고맙게도 부서 사람들이 가끔 연락을 줬다. 그리고 어쨌든 발리에서도 계속 부서 롤 대항전 연습을 했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조금은 그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복작복작한 분위기, 서로 의지하면서 보내던 시간들, 심지어는 한밤중에 야근하면서 나누던 푸념과 한숨까지도. 물론, 기억은 미화되기 때문에 그리움에 속으면 안 된다. 그냥, 문득 그런 시간들까지 그립다는 생각이 들면서 확실히 나는 회복된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벗어나서 개인적으로는 음… 그냥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경험을 해보았다는 것?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사는지 좀 더 알았다는 것? 가령, 생각보다 나는 더욱더 바다와 음악과 글쓰기를 좋아하고, 나의 체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 중에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밖으로 나다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단편적이고 표면적인 생각 밖에 안 한 것 같다. 길리에 와서는 특히 매일 물놀이하느라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곳에서의 나는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이 딱히 없었다. 삶에 대한 큼지막한 고민들은 숙제처럼 한국에 남겨두고 온 덕분이다.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마음에 비자를 연장할지 고민도 수십 번 했다. 아니 수백 번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것은, 내가 여기에 더 있고 싶은 마음에는 물론 이곳이 좋아서도 있겠지만, 사실 무엇보다 한국에 남겨두고 온 것들을 마주하기 싫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회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나의 휴직 3개월의 목표가 지속가능한 형태의 삶을 위한 초석을 닦는 것이라면, 충분히 회복했으면 이제 일상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을 이루는 것은 추억과 관계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일상을 살았기 때문일까, 어느새 나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이곳을 떠나는 게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잠깐 머물다 가는 나에게 정을 나누어 준 친구들에게, 우붓에서 사 온 과일잼을 하나씩 주고 떠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주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산 거지만, 한국에서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니까. 지금의 나에게는 가진 게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잠깐 스쳐가는 인연인 나를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간직할 수 있는 걸 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기념품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무사히 홀로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에서 내 일상을 궁금해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블로그와 브런치와 인스타에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들을 열심히 챙겨 읽고 연락해 주는 친구들을 보며 거기에 담긴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나는 타인과 일상을 잘 공유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 쓰는 일기도 남에게 보여주기보다 언젠가의 나를 위해 남겨놓는 기록이었다. 그런 불친절한 기록들을 읽고 나의 일상을 간접적으로 함께 하는 친구들 덕분에, 여기서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과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이었는지, 멀리 떠나서야 또 깨닫는다.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것들만 보고 지낼 때는 간과했던 것들이다. 그 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모든 것은 추억이 되었고, 나는 여기에 나의 일부분을 남겨놓고 간다. 여기서 만든 추억과 감정들로 또 힘내서 살다가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





라는 글을 이번 주가 끝나고 한 달 살기를 마무리하면서 올리려고 미리 써두었다. 그러면서, 돌아갈 비행기표 시간을 찾아봤다. 차마 날짜 확정 버튼을 못 눌렀다. 한국으로 떠날 마음을 다잡으려고 글을 썼다. 이미 나는 여기서 얻을 것을 다 얻었다고, 그러니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내가 이제는 떠나도 되는 이유를 적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왜 그토록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싫은지, 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지, 왜 이대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은지. 일상이 싫은 건지 한국이 싫은 건지 이곳에 정들어서 슬픈 건지 이곳 자체가 좋은 건지, 내가 괜찮은 게 아닌 건지 나는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안다. 이렇게 미루기만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돌아가는 게 달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눈물이 말해주는 건, 내가 아직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그러려고 떠난 이번 여행, 나는 한 번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나한테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자.


나는 비자를 연장했다. 나의 한 달 살기는 한 달 일주일 살기가 되었다. 고작 일주일만 미뤘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 필요한 건 목표와 성장이었을 수도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