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이 Oct 26. 2024

나 사실 너와 보냈던 시간을 일기에 썼어, 볼래?

타인에게 글을 보여준다는 건



이제 발리/길리에서 지낸 지 5주가 지났다. 내 여행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보자면, 발리에서 보낸 2주와 길리에서 보낸 3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발리와 길리는 분위기도 문화도 환경도 좀 다르기 때문에 발리에서 지낸 초반부는 굉장히 아득하게 느껴진다. 나의 마음가짐도 좀 달랐는데, 발리에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체험하는 여행자였다면, 길리에서는 정말 눌러앉아서 일상을 보냈다. (발리에서도 일상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길리와는 정말 차원이 다르라...)


또 다른 결정적인 차이로는, 발리에서 나는 한국인과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었다. 기껏해봐야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 두어 번 정도? 반면에 길리에서는 비교적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지냈다.


길리에서 친구들이 생기면서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내가 여행의 모든 순간들을 블로그에 일기로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으로 시작했던 일기는 차츰 내 친구들에게 근황을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 되어갔고, 간혹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열심히 읽어주셔서 연재하는 기분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그러면 내 일기에 등장하게 되는 길리에서 만난 인물들은 어떡하지?


그게 왜 고민이냐면, 그 사람들은 나랑 보낸 시간들이 블로그에 전체공개로 박제 된다. 비록 얼굴 다 가리라도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양해를 구하려면 자연스럽게 블로그를 공개하게 될텐데, 그건 또 꺼려졌다. ‘오늘은 누구누구를 만났는데 어떠어떠했다~’라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의 감상을 당사자한테 보여준다는 게 민망했다. 혹시라도 언급되는 것 자체 기분 나쁘진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애초에 나한테는 남에게 글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은 행위다. 몇 년째 하고 있는 회고모임이나 브런치에서는 허구한 날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올리면서 뭔 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공개 글 올리는 것 자체가 내가 어려워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그런 모임들은 애초에 글을 공유하는 모임이고, 대부분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자유롭다. 반면에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갑자기 너무 내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는 급발진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망설이다 지금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흘렀다.


그렇지만 나는 단 한 명, 길리에서 만난 나의 여행 첫 동행 S에게는 우리가 함께 한 날에 대한 기록을 꼭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하루종일 투어를 함께 한 탓에 그날의 내 일기가 곧 그 친구의 일기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날은 또한 내게 무척 의미 있는 날이었다. 길리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만난 덕분에 프리다이빙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고, 다른 한국인 친구들도 열린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추억을 두고두고 S와 공유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길리에 막 들어온 그날은 S의 길리 마지막날이었고, 우리는 단 하루만 만나고 헤어졌다. 그래서 차마 단 한 번 만난 사이에 “내가 쓴 일기인데 볼래?”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까? 무릇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이 그렇듯, 대로 다시 안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회의적인 태도로 우리의 인연을 대했다. 그런데 그런 나와 달리 S는 내가 인스타에 올리는 것들을 꾸준히 챙겨보면서 나의 길리 여행을 함께 해줬다. 성장하는 나의 프리다이빙 실력을 응원면서, 한국 오면 꼭 같이 잠수풀 가자고 했다. 나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것을 확신하는 S에게, 어느 순간, 마음의 문이 열렸다. 그래서  고백했다.


나 사실 블로그에 일기 쓰고 있는데, 이거 우리 만난 날이야…!


그 말에 S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했다.


언니, 저 눈물 날 것 같아요...


내가 쓴 단락 하나하나를 꼼꼼히  감동 표현하는 S를 보며, 그동안 내가 괜한 걸 걱정했구나 싶었다.


나는 마음의 문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보여주고 싶은, 혹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선별해서 최대한 상대가 원하는 모습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글을 안 보여주려는 것도 그 이유인 것 같다. 글 쓰는 자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 내 글이 과하게 진지해보일까봐 걱정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자아가 나 자신이다. 어쩌면 글을 쓰는 목소리가 가장 진정한 내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그걸 숨겨서 나는 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싶었던 걸까. 나의 가볍고 유쾌한 면만을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무슨 소용일. 사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 많은 진지한 화자로서의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일 텐데, 정작 나는 왜 그 모습을 부끄러워할까.


그러니 앞으로는 그냥 처음부터 블로그에 겠다고 말하고 다녀야겠다. 그리고 좀 더 자랑스럽게 드러내야겠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이전 13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