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수많은 인연들에게서 삶의 방향을 찾다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살기로 했다.
올해 나이 마흔. 오십이 될 향후 10년간, 나는 현재보다 좀 더 열심히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이곳 캐나다에 와서.
한국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육아 휴직 등의 공백이 있긴 했지만 일을 시작한 지도 17년이 넘어서 학교 안에서도 경력이 중간, 경우에 따라서는 높은 축에 속하기도 했다. 어느덧 부장 직함을 달기도 했고, 아이들도 초등 고학년이 되니 이제 나는 '어르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느덧 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나서기보다는 한 발 빼기도 했다. 때로는 '나 말고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야'라는 점잖은 마음으로, 때로는 '나 말고 더 젊은 사람이 하겠지'라는 꼰대 같은 마음으로.
하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곳 캐나다에서.
캐나다 생활에 어느 정도 정착한 후, 슬슬 아이들과 남편이 학교에 간 그 시간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본업인 만큼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집안일도 하고 했지만 육아 휴직 이후로 '몸이 바빠도 정신이 심심해지는 상태'는 오랜만이었다.
그 무렵 지역 도서관에서 실시하는 무료 영어회화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주변 사람에게서 듣고는 수, 목 오전에 1시간씩 그 수업을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등록을 따로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와서 편하게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 참여를 하면 시작은 자기소개였다. 내가 예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여기엔 어떤 체류 자격으로 있는지, 때로는 취미가 무엇인지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 이야기하면 되는 시간. 5명에서 많게는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한 명의 리더를 주축으로 모여 앉아 차례차례 소개를 시작했다. 다양한 국가에서 저마다의 사연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알제리에서 항공 관련 엔지니어 대학을 졸업했다는 24세의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캐나다에 왔다고 했다. 이슬람 국가인 알제리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일자리 기회가 더 많은 편인데 그중에서도 항공 쪽은 거의 그녀 취직할 수 있는 가망이 없더라고 했다. 여기서는 자신의 기술을 살려 일할 수 없어서 지금은 옷 가게에서 일한다는 그녀는 그래도 여자가 혼자 돌아다녀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캐나다가 좋다고 했다. 콜롬비아에서 변호사를 했다는 그는 프랑스어도, 영어도 아주 능통했지만 불안한 콜롬비아의 경제나 정치 상황을 떠나 캐나다에서 공부하며 정착하고 싶어 하는 아내를 지원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하우스 허즈번드로써 아이들과 아내를 케어한다고 했다. 아무리 콜롬비아라도 변호사라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을 텐데도 과감히 가족을 위해 선택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대단했다.
그들의 열정에 비하면 나의 상황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남편의 공부를 서포트하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따라온, 꼭 여기 영주권을 얻으려고 바등거리지 않아도 되는, 어쩌면 일 년의 휴가를 얻어서 와 있는 나는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소위 말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그들의 열정과 용기 앞에서 나는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화 모임에서 또 한 번 놀랐던 것은 회화 모임의 리더들이었다. 도서관 회화모임은 봉사활동으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참여비도 없지만 리더를 해주시는 봉사자 분들에게도 수고비가 없다. 대부분 리더 선생님들은 60세 이상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모두 원래 하던 일을 은퇴하시고 일주일에 한두 번 자신의 시간을 이민자들을 위해 쓰고,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시는 분들이었다. 은퇴를 하고 나면 연금 받으며 마냥 쉬고 싶을 것 같은데, 나는 지금도 만약 명예퇴직을 하면 여행 갈 계획만 머릿속으로 실컷 하는데 그분들은 또다시 일을, 그것도 무급의 봉사활동 일을 그렇게 성실하게 준비하시고 참여하시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그중 단연 으뜸은 마리사 선생님이다. 그녀는 80세의 고령이지만, 항상 눈동자가 빛나고, 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셨다. 실생활에 많이 쓰는 관용어구와 그를 이용한 게임을 늘 준비해 오시고,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적어 두셨다가 꼭 다음 시간에 피드백을 해주셨다. 어느 나라 음식이든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 먹어보시고, 어느 나라 이야기든 편견 없이 들어주셨다. 한번 선생님과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자신의 삶의 가장 큰 모토는 '호기심'이라고 하셨다. 호기심이 있어서 늘 궁금했고,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걸 알려주는 게 너무나 즐겁다고 하셨다. 80세가 넘으셨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자차 운전을 즐기시는 그녀의 열정이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그녀는 나의 워너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계기는 한인 여성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한인 커뮤니티가 그리 크지 않은 오타와지만 그래도 이민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가장 오래되신 분이 70년대 정말로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 여기 오셨다고 했다. 누구 하나 사연 없는 분이 없고,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눈물 지을 만한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으시는 분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을 딛고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시고, 영역을 개척하시고, 50대가 넘은 나이에도 연구와 사회 기여를 끊임없이 하시는 분들이 거기 있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한글 동화책 모임을 시작하고 재능 기부로 모임을 꾸려나가고, 그러다 모임이 커져 한글학교가 되기도 하고. 거저 되는 것은 없었다. 한인 사회가 하나도 없었던 이곳에 지금 규모의 한인 사회를 밑바닥부터 다지고 쌓아 올린 건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교사로서 내가 얼마나 지금 위치에 안일하게 머물러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살기로 했다.
마흔 살의 나는 이십 대의 나의 노력과 삼십 대의 열정으로 지금 디딘 바닥을 다졌다. 이 바닥에 뿌리를 내려 안온하고 편안하게 살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살기로 했다.
지금 다져놓은 내 삶을 바탕으로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달려 나가야겠다 다짐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도 더 열심히, 이미 다 키웠다 생각한 내 아이들에게도 더 정성을 쏟아야겠다. 그래서 10년 후 오십이 되었을 때, 그동안 내가 정말 열심히 달려온 길을 뿌듯하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난 수많은 사연의 얼굴들과, 아직도 소녀처럼 호기심으로 눈빛이 반짝거리는 마리사 선생님과, 자신들의 열정의 산물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한인 여성회 분들에게서 감사하게도 앞으로의 나를 밀고 나갈 힘을 얻었다.
그래서 나도 더 열심히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