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응원과 혐오 사이, 라리가는 인종차별을 이길 수 있을까

Diversity in Sport (2)

by 축축박사


저는 해외축구팀 중에는 레알마드리드를 좋아합니다. 지네딘 지단의 우아한 플레이에 반해 벌써 20년 넘게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창 볼 때만큼은 아니지만 요즘에도 중요한 경기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챙겨보고는 합니다. 해외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종종 인종차별을 하거나 당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이 또는 관중들이 눈을 찢거나, 원숭이 흉내를 내거나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경기장도 우리 사회의 연장선이니까요. 탑리그일수록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인종의 선수들이 모이기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보고 있자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지만, 소수의 일탈이라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알마드리드 선수인 비니시우스에 대한 일련의 사건을 보기 전까지는요.




비니시우스를 향한 인종차별

2023년 1월, 레알마드리드와 지역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기 전날, 마드리드의 한 다리에서 레알마드리드의 젊은 유망주 비니시우스 주니오르(Vinicius Junior)의 유니폼을 입은 인형이 목이 매달린 채 발견됩니다. 이 섬뜩한 모습은 제 축구팬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사진 중 하나로, 현지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벌인 4명의 아틀레티코 팬들은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당시 22살의 어린 선수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202301271323480548_l.jpg 레알의 비니시우스 유니폼을 입은 인형이 마치 교수형에 처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마드리드는 레알이 싫다'는 현수막과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 한 다리에 매달려 있는 모습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비니시우스를 향한 스페인 타 구단 팬들의 인종차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5월 라리가(스페인 프로축구리그) 35라운드 발렌시아와 레알마드리드의 경기에서도 충격적인 인종차별이 자행됩니다. 발렌시아 홈 경기장을 가득 채운 발렌시아 팬들이 비니시우스를 향해 경기 내내 '원숭이', '검둥이', '죽어라' 등 인종차별적인 야유와 조롱을 내뱉었고 경기장 전체가 '비니시우스는 원숭이'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 끔찍한 광경은 더 이상 소수의 일탈이 아니었죠. 인종차별이 도를 넘자 비니시우스는 관중과 언쟁을 하며 항의했으나 발렌시아 팬들의 인종차별은 더욱 거세졌고, 감정이 격앙된 비니시우스는 결국 선수들 간의 분쟁에서 상대선수의 얼굴을 가격해 퇴장당하고 말죠. (이 퇴장도 상대 선수가 먼저 비니시우스의 목을 조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 비니시우스는 경기장에서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NK22HWAHQ



경기 이후 비니시우스는 SNS를 통해 아래와 같이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이 처음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닙니다. 라리가에서 인종차별은 일상입니다. 리그와 협회도 이를 정상으로 여기고, 상대팀들은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때 호나우지뉴,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메시가 활약했던 이 리그는 이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리그가 되어버렸습니다. 스페인은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제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라지만, 이제 전 세계에 ‘인종차별 국가’라는 이미지를 퍼뜨리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브라질에서 스페인은 ‘인종차별 국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매주 벌어지는 이 일들 때문에 저는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강하고, 끝까지 인종차별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긴 여정이 되더라도요.


수많은 동료 선수들과 축구계의 지지에 힘입어 스페인 정부까지 개입하여 일부 발렌시아 팬에게 징역이 선고되었지만(이는 스페인에서 경기장에서의 인종차별로 유죄가 판결된 첫 번째 사례입니다), 이미 비니시우스의 말대로 스페인은 그리고 라리가는 '인종차별' 국가와 리그가 되어버린 후였습니다. 특히 라리가는 미흡한 대응으로 많은 비판을 함께 받았죠.


모두 비니시우스.jpg '우리는 모두 비니시우스다' 발렌시아에서의 인종차별 사건 이후 레알마드리드 선수들이 비니시우스를 지지하기 위해 경기 전 진행한 퍼포먼스 (출처 : 게티이미지)




"LALIGA VS RACISM"

이에 라리가는 인종차별과의 전쟁을 선언합니다. "LALIGA VS RACISM" 캠페인을 통해서요. "LALIGA VS RACISM" 캠페인은 리그 안에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캠페인입니다. 각 팀의 주장들은 "LALIGA VS RACISM"이 적힌 주장 완장을 착용하고, 경기장 곳곳에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안내 포스터와 스티커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소년 선수들에게 인종차별 이슈에 대해 교육을 진행하고 있고, 온라인에서도 팬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인식을 확산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죠. 바로 어제인 3월 21일은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인데, 이를 기념하여 라리가 28라운드 경기(3/14-16)에서는 모든 클럽이 특별한 유니폼을 입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문구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https://www.laliga.com/en-GB/laligavs/laligavsracism/initiatives

인종차별 철폐의 날.PNG 지난 3월 14일 라스팔마스와 알라베스 선수들이 인종차별 반대 특별 유니폼을 입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 as)


이러한 라리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수들은 아직도 라리가의 대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좀 더 실효성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지난 라운드는 모든 라리가 경기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특별 유니폼을 입는 날이었지만, 발렌시아 소속의 프랑스 수비수 무크타르 디아카비(Mouctar Diakhaby)는 경기장에 티셔츠를 착용하지 않은 채 등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날 인종차별을 당했던 자신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은 라리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죠. 2021년 발렌시아와 카디즈와의 경기에서 카디즈의 후안 칼라(Juan Cala)가 디아카비에게 '더러운 흑인(Negro de mierda)'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논란이 되었으나, 라리가는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칼라에게 어떠한 징계도 내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라리가 내 인종차별 근절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라리가의 조치가 아직 충분치 않다는 반응도 있고요. 하지만 비니시우스 선수의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 프로축구 내에서 인종차별이 큰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만큼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물론 이 캠페인의 성공하기 위해서는 라리가의 지속적인 관심과 실질적인 조치(가해자들에 대한 납득 가능한 징계)가 취해져야겠죠. 라리가의 인종차별과의 전쟁이 승리로 막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페인 #라리가 #레알마드리드 #비니시우스 #인종차별 #라리가VS레이시즘 #인종차별 #세계인종차별철폐의날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축구선수의 품격, 약속 지킨 '빛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