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의 PDF에 적힌 자원봉사자의 의무
생장으로 떠나는 짐 싸기
5월이 시작되니 슬슬 생장피에드포르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자원봉사를 위해 떠날 짐을 챙겨야겠다 싶었다. 복작복작한 생장까지의 모든 교통편을 예약하고 나서야 여행가방을 열고 짐을 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나의 자원봉사 일정은 월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총 8일이었지만 소도시인 생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팜플로나에서 하루 밤, 오전 근무를 소화하기 위해 생장에 하루 전에 도착해 하루 밤, 이렇게 두 밤을 더 지내게 되었다. 게다가 돌아올 때도 월요일에 일이 끝나자마자 차가 있는 게 아니니 화요일까지 하루 밤 더, 마드리드에 도착해 하루 밤 더 자고 가야 하는 새벽 비행기라 총 이틀 밤이 추가되어 결국 12박 13일의 긴 일정이 되어버렸다. 근 2주일간을 머물 짐을 싸느라 큰 여행가방을 꺼내 들었다. 나름 순례자의 도시 생장으로 가는 길이니 오랜만에 순례자 시절 기분도 낼 겸 오스프리 백팩을 메고 가볼까 싶었는데 순례길용 가방은 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늘 잘 챙겨야 하기 때문에 휙 열고 막 집어 넣을 수 있는 일반 러기지로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순례길 향수는 일단 생장에 도착해서 마음껏 즐기기로 하자고요.
내가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순례자 사무실에 봉사하러 가는 거니 원피스 같은 거 말고 무난하고, 오래 앉아있을 때 편한 검정진들과 셔츠와 재킷들을 몇 개 챙겨 넣었다. 순례자들을 마주할 생각에 화려한 것보다는 깔끔하고 수수한 옷들에 손이 간다. 무언가 나도 순례자들의 꾸밈없는 자연스러움과 캐주얼함에 결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나 보다. 화장품, 생활 비타민들, 샴푸와 린스 등등 필요한 것들을 담는데 뭐 별거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가방이 가득 차네? 이번에는 순례길을 떠나는 것처럼 ‘가서 불편하면 버리자!‘ 이런 마인드도 아니고 의외로 더 담백하게 봉사활동하러 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가져가자 싶었는데도 허허… 나는 짐을 컴팩트하게 잘 싸는 사람이 정말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중대형의 여행가방 하나만 가져갈 수 있게 마쳤다. 정말 2박 3일 한도시만 여행을 가도 기내용 트롤리와 수화물 여행가방, 뒤로 메는 가방까지 다 가져가는 나에게 12박에 가방 하나 나왔으면 선방한 거다. 나름 프랑스 슈퍼마켓에서 좋아하는 과자 쓸어 담아 올 공간도 확보해서 짐을 쌌다! 이 정도면 아주 만족하는 짐 싸기였다고 할 수 있다.
생장에서 온 6장의 PDF 파일에 담긴 내용
출발하기 몇 주 전, 모니크에게서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어떻게 생활하게 되는지부터 시작해 자원봉사자로의 의무, 규칙, 자세 등에 대해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는 시설에 관해서 말고는 사전안내를 받은 적도 없고, 업무인수처럼 당일 사무실에 가서 다른 봉사자들 옆에서 일하며 같이 배웠는데, 생장은 그 결이 다른 게 신선하고 재밌다. 6장의 PDF에는 주제별로 다양한 설명들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수차례 강조되는 건 ‘순례자를 대하는 봉사자의 자세‘였다. 거진 T성향의 자원봉사자들도 F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예시와 설명들을 통한 결론은 ‘진실함, 따뜻함, 관심’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익을 창출하러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수백 명의 프랑스길을 걷기로 선택한 순례자들을 반기며 웃음으로, 마음으로, 정성으로 그들에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 축하, 안정감을 전달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수성 풍부한 대문자 F인 한 사람으로서 모두 공감하는 내용들이었다. 순례자들에게 정말 진심이라고 할까? 적어도 10분은 대화를 하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휴먼컨택, 인간적 교류를 권장하는 안내문을 보니 생장에 가는 날이 더 기대되었다.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023년 순례자 사무실에서 내 첫 순례자여권, 크레덴셜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한참을 줄 서서 기다리다 영어를 구사하는 안내자를 찾아 사무실의 가장 왼쪽 자리에 앉았다. 미국에서 오셨다는 짧은 머리의 70대 여자 자원봉사자분은 아주 밝고 친절하셨는데 내가 준비를 많이 해와서인지는 몰라도 크게 이것저것 묻는 것 없이 5분 정도의 설명에 도장을 찍고 남보다 일찍 끝이 났었다. 짧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늘이 내 자원봉사 첫날이야.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 라며 웃으시길래 ”우리 모두 첫날이네요. 정말 잘하고 계세요. 친절하시고 설명도 감사해요. “라고 대답해 드렸었다. 새내기 자원봉사자와 새내기 순례자가 함께한 기념사진을 찍었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은 아직도 내 사진첩에 들어있다. 그게 바로 어제 같은데 말이야, 시간 정말 빠르다. 순례길에 대해서 정말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정보를 모았으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멈출 수가 없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밝은 자원봉사자분 덕분에 파이팅 하는 기분으로 웃으며 첫 시작을 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그분처럼 새내기 자원봉사자가 되어 생장 사무실에서 순례자들의 맞은편에 앉게 되다니 묘하게 설렌다. 얼른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순례자들을 만나 내가 느꼈던 설렘을 함께하고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밝은 봉사자가 되어야지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