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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팜플로나. 잘 있었지?

생장 가기 전 팜플로나에서 하룻밤

by 몽키거
생장으로 향하는 여행길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생장으로 가기 위해 출발하는 날이다. 오늘은 아침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에 도착한 뒤 기차를 타고 3시간 반 정도 팜플로나까지 이동하는 날이라 그곳에 도착하면 저녁이 돼있을 것 같다. 다행히 신랑이 비행 없는 날이라 공항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출국장에 들어가기 전 나에게 돈 넉넉히 있냐, 더 필요하니, 도착하는 곳마다 전화해서 어디인지 알려달라, 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야 한다 등등 여러 번을 묻고 나서야 날 보내주는 게 늘 고맙고 든든하다. 결혼을 하면 때로는 아빠 같은 든든한 기둥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우리 신랑은 따뜻해야 할 때는 이렇게 엄마 같은 그물망이 되어 나를 살뜰히 보살펴준다. 나 참 결혼 잘했다 생각이 든다. 멋진 남편을 넘어 아빠의 강인함에 엄마의 부드러움까지 갖춘 신랑덕에 늘 순례길과 봉사활동 등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언제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행운이다. 우리 신랑은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니 인생에서 나에게 가치 있는 일들을 하라고 늘 격려해 준다. 내가 나일 수 있게 말 그대로 물심양면 응원해 주는 신랑은 내가 코너를 돌아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고마운 신랑을 한번 더 눈에 담은 뒤 뒤돌아 오늘도 내가 사랑하는 가치를 찾아 생장으로 가는 길, 즐겁고 힘차게 나아가 보기로 한다.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역시나 역사와 그 당시 사회 시대상을 잘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다른 나라의 문학이기 때문에 옮긴이의 글을 안 읽을 수가 없다는 게 아쉽다. 결국에는 그들의 눈에 내가 읽은 게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반추해야 해서 내가 글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내용 안에 깔아놓은 복선이나 표현들이 마음에 드는 구문이 많아 좋은 책이었다. 책 속의 차가운 겨울이 내게도 시리게 느껴졌고, 독자들에 의해 해석이 다양할 수 있는 결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 알려져 있는 만큼 7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이니 오늘처럼 이동 많은 날에 집중해서 보기 딱 좋은 길이의 책이라 추천하고 싶다. 비행기에서 책을 읽고 있자니 정말 내가 여정을 시작했구나 하는 느낌이 제대로 오는 게 역시 여행 기분내기에는 시간개념까지 앗아가는 동영상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다방면으로 생각해주게 하는 책이 좋다.


마드리드 도착, 이제 팜플로나로 가보실게요
아토차역에서 팜플로나행 기차를 탈 시간이다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 후 공항버스를 기다리는데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린다. 그 와중에도 큰 배낭을 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순례자인 것 같아 내가 다 설레네. 저분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잔뜩 설레실까? 오지랖만 넓어 별 생각을 다한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려 이왕 줄 서는 거 괜스레 순례자처럼 보이는 이들 근처에 서본다. 왜인지 그들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30분쯤 기다린 뒤 도착한 버스가 하필 만석이라 눈앞에서 보내줘야 했다. 운항 편이 많은 정오 근처 랜딩시간에는 기다릴 각오를 하고 버스를 타야 한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다행히 비행기 랜딩 시간과 기차 출발하는 시간 사이에 2시간 반정도의 여유가 있어 촉박하진 않았다. 예전 직업에서 온 병인지는 몰라도 시간에 늦는 걸 별로 안좋아해서 난 공항이든 역이든 미리 가서 1시간을 더 기다리더라도 딱 맞춰 표를 사진 않는다. 무조건 여유 있게, 출발 전에 넉넉하게 도착해서 여정을 앞두고 서둘러야 하는 일이 없도록 계획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버스가 늦게 오고, 사람도 많아서 결국에는 기차역에 40분 정도 전에야 도착했다. 게다가 아토차역이 그라운드, 미드레벨 이래저래 승차위치가 층마다 나눠져 있어 찾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입구끼리도 거리가 멀어 정말 일찍 도착해야 한다. 출발 20분을 남기고야 나도 팜플로나행 기차에 올라탔다. 휴~ 시간이 넉넉했으니 망정이지 넋 놓고 있었다가는 기차를 놓쳤을 것 같다.

3시간 반을 타고 가는데 뭐지? 예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이번에만 그런 건지 기차가 아주 많이 흔들린다. KTX처럼 레일에 딱 붙어서 슝 가는 느낌이 아니라 옛날 기차처럼 덜컹덜컹 가는데 그 속도만 더 빠른 느낌? 기차의 덜덜덜 하는 흔들림이 끊임없이 느껴지는 게 오래 타니 허리도 좀 뻐근하다. 아마 내가 순례자로 갔을 때는 긴장감 반 설렘 반에 엄청 흥분이 돼있어 신나기만 했나 보다. 피식 웃음이 다 나왔다. 아이고 이제 순례자 아니라고 편한 거 따지는 거야, 뭐야? 별게 다 눈에 보이고 별게 다 느껴지는 것 같아 웃기기만 하다. 이번에는 기차에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기 시작했는데 크게 집중을 못해 중간중간 앞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들 비행기표를 들여다보았다 말았다 하다 보니 어느새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어휴, 생각보다 길었어. 여하튼 수고하셨습니다! 팜플로나에 도착했습니다!


안녕, 팜플로나! 나 기억하지?
비가 와도 예쁘기만 한 팜플로나의 까스띠요 광장


숙소에 가방을 풀자마자 팜플로나 시내로 뛰쳐나간 시간이 이미 7시를 반을 넘었다. 비가 왔다 안 왔다 하니 늦은 시간에 욕심부리지 말고 저녁만 맛있게 먹고 들어오자고 마음먹었다. 숙소 위치를 일부러 내일 탈 알사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곳으로 잡았는데 팜플로나 중심가인 까스띠요 광장까지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리네? 의외의 수확에 괜스레 즐겁다. 오늘의 저녁은 핀초바로 유명한 Iruñazarra에 왔는데 구글평점 4.4에 후기만 6만 개가 넘을 정도로 믿고 먹을 수 있는 곳이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팜플로나에 머물렀을 때는 같이 걸었던 선생님, J 군, 미국아저씨와 함께 Bar GAUCHO Taberna라는 곳에 갔었는데 추억도 되새길 겸 다시 갈까 싶다가도 오늘은 무언가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어 검색 뒤에 정한 곳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띤또 데 베라노를 시키고는 매대 가득한 핀초들을 쳐다보자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주문을 받는 분께 가장 유명한 게 뭐냐고 추천해 달라고 해서 바깔라우와 쵸리조를 시켰다.


Iruñazarra의 핀쵸들과 띤또 데 베라노


일단 띤또 데 베라노부터 벌컥벌컥 들이켜주니 세상 살 것 같다. 역시 나는 달달한 술이 아주 좋단 말이야. 이곳은 핀초의 가격이 다른 곳보다는 살짝 높은데 참신한 조합도 많고 일단 크기도 가격만큼이나 크고 넉넉해 충분히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되었다. 자잘하기보단 크게 한방, 재료 듬뿍 올려 잘 만들어 놓은 고급진 느낌이 나는 음식이 많아 너무 좋았다. 다 먹은 후 큼지막한 이베리코 돼지고기 꼬치도 하나 더 주문했는데 배불러서 한입 먹고 두고 나왔네 그려. 나는 워낙에 띤또 데 베라노를 좋아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니 여긴 생맥주가 찐인 곳이더라. 혹시나 가게 된다면 얇은 샴페인잔 같은 곳에 따라주는 작은 사이즈의 까냐를 종류별로 시식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 같다. 탭맥주가 날개 달린 듯이 팔리고 있고, 스태프들이 핀초를 담는 것보다 탭맥주를 따르는데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 너무 북적북적해서 뭔가 싶다가 지금이 토요일 저녁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쩐지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이 꾀나 되더라. 짧지만 굵게 맛있는 술에 맛있는 핀초를 먹고 만족한 기분으로 자리를 떴다.

비는 내리고, 팜플로나는 밤을 연다
비가 내려도 팜플로나는 멈추지 않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팜플로나의 밤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다. 골목마다 가득한 야외바 차양 밑의 사람들은 비가 뭐 대수라는 듯 친구,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기 바쁘다. 젊은 친구들부터 연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이곳저곳의 바에 잔뜩 나와계신다. 언뜻 보면 팜플로나 사람들이 반상회 위해 다 모인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와 상관없이 그 인구가 어마어마하다.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몰라도 딱 하나 확실히 한 건 쏟아지는 비보다도 야외 바에 앉아 핀초에 까냐 한 잔 기울이며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중요해 보였단 거다. 뭔가 낭만 있는데?

나도 더 머물고,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빗방울이 굵어지는 게 심상치 않아 발걸음을 서두른다. 역시나 숙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장대비가 쏟아져 크게 젖었다. 숙소에 들어오니 벌써 9시다. 아침 일찍부터 비행기 탄다고 준비하고, 비행기에 버스에 기차 타고 저녁에 도착한 팜플로나에서 핀초 맛이라도 본 게 어디니 생각하며 하루를 마치기로 했다. 잘 자고 내일 버스 타고 생장 갈 준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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