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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프랑스 생장 순례자 사무실인데 너 올래?

생장피에드포르에 자원봉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by 몽키거
프랑스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도착한 한통의 이메일

계획에 없던 포르투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보려니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자들을 담당하는 모니크한테서 온 거네?


Hello,
I have just had some cancellations for periods when you could come and welcome pilgrims to the SJPDP office.
These are week 18, i.e. from 28/04 to 05/05, or week 20, from 12/05 to 19/05/2025
If you agree, please let me know soon. Thank you

안녕하세요,
SJPDP 사무실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해 주실 수 있는 기간에 일부 취소가 생겼습니다.
가능한 주는 18주 차: 2025년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또는 20주 차: 2025년 5월 12일부터 5월 19일까지에요.
가능하시다면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자원봉사 지원메일을 보내고 답변을 받은 뒤, 가능한 날짜들을 적어 캔슬이 나면 불러달라 메일을 보낸 지 약 보름이 넘긴 시점이었다. 그 이후에 알았다, 알려주겠다 등의 답변이 따로 없어 내년에 지원해야지 하고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정말 답변이 온다고? 정말 캔슬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네! 자원봉사자들을 관리하는 모니크가 내가 가능하다고 했던 기간들을 기억했다 다시 연락을 해줬다는 게 참 고마웠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의 취소로 내가 선택 가능한 슬럿이 더 생겨다는 이 메일을 4월 15일에 받았는데 뭔가 같은 달 28일에 가기에는 살짝 촉박한 감이 있어서 5월 중순에 하는 여유 있는 20주 차를 선택해 답변을 보냈다.

‘너무 좋은 소식이네요. 다시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말씀해 주신 두 개의 슬럿 중에 두 번째, 5월 중순인 20주 차에 조인하겠습니다.‘

5월 중순이라… 너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좋은 날씨에 갈 수 있게 되다니 이렇게 완벽한 시즌에 골라 가기도 힘들겠다 싶어 신이 난다. 그럼 5월에 보자는 모니크의 짧고 확실한 답변을 받고 나서야 모든 게 확정되었다. 나는 이제 한 달 뒤에 프랑스 생장으로 가는 거다.


생장피에드포르, 순례길의 시작
2023년의 생장과 나의 첫 순례자 여권

도착했을 때 그 설레던 마음과 조금은 어색하고 수줍었던 순례자 사무실로의 입장. 수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내일의 시작을 기다리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을 도시 전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때의 감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먹었던 음식, 내일 가져갈 간식을 사보자고 갔던 까르푸, 내가 하루를 보낸 알베르게의 사람들 등 모든 게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 같이 선명한데 벌서 2년이 다 되어간다니 시간 참 빠르다. 의외로 31일간의 순례길을 마치고 산티아고에 도착해 콤포스텔라를 받으러 갔을 때는 아주 덤덤했는데 말이야. 물론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진입로인 굴다리를 지날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며 울음이 터져버리긴 했지만 순례자 사무실로 이동해 콤포스텔라를 받을 때는 조금 사무적인 분위기에 살짝 경직되었던 것 같다. 그때가 2023년, 코로나의 여파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진 않았을 때라 봉사자들과 순례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아크릴 가림막이 있었고, 사실 확인 후 마지막 도장과 콤포스텔라만 받고 거진 2분 컷? 아주 빠르게 나왔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콤포스텔라를 받은 기억을 간결한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한다면 출발점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기억은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한 로맨틱 영화 같다고나 할까. 아마 평생 순례자였던 적이 없던 나의 첫걸음을 앞두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앞으로 펼쳐질 모험들에 대한 겁이 없어 더 즐거웠던 걸까. 이래나 저래나 즐거웠던 기억이었음은 확실하다.


2023년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던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 내부와 자원봉사자 분이 찍어준 순례자 여권의 첫 도장


모니크와 주고받은 몇 편의 이메일 끝에 추억이 가득한 내 순례길의 시작, 그 로맨틱 영화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내가 설레었던 만큼 새로운 순례자들의 순수한 즐거움과 기대 가득한 모습을 마주할 생각에 벌써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일생일대의 큰 경험에 대해 우리가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건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길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한 달은 걸릴, 두 발로 시작하고 두 발로 끝내는 800km가 다 되어가는 길을 부분적으로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산티아고에서는 순례자들과 함께 여정뒤의 카타르시스, 교차하는 만감, 충만함과 성취감, 감사함을 나누며 웃고 울었던 경험을 한가득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너무 기대된다. 길을 완성한 순례자들이 아닌, 내일부터 본격적인 순례자라는 이름을 달게 될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까? 어떤 점이 이들을 순례길로 인도했을지 수많은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2023년 프랑스길 순례길 걷기, 2024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서 콤포스텔라 발급 자원봉사에 이어 2025년 올해는 이렇게 프랑스길의 시작 생장피에드포르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여권 크레덴셜을 발급해 주고 긴 여정에 첫발을 내딛는 순례자들을 응원해 주는 자원봉사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 순례길 중 프랑스길의 시작- 순례길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큰 고리를 한 바퀴 돌아 완성 시키는 듯한 느낌이라 뿌듯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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