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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포트와인에 빠져버렸네

포르투 하면 포트와인 아니겠어

by 몽키거
저는 디저트와인을 좋아합니다

훌륭한 와인이 넘쳐나는 이탈리아에 살면서도 와인을 마시는 날이 아주 드문 나. 신랑이 술과 담배를 안 할뿐더러 나도 식사와 함께 한잔 정도 가볍게 즐기는 터라 한 병을 열면 한두 잔 먹다 마니 잘 안 마시게 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관심 있고 좋아하는 술은 바로 디저트 와인, 디저트 술인데 특히 헝가리의 토카이, 프랑스의 소테른, 독일의 아이스바인 같은 종류가 내 최애이다. 리슬링, 모스카토, 게뷔르츠트라미너도 좋아하는데 나는 이렇게 달달한 술이 왜 그렇게 좋은지. 음식이랑은 영 페어링하기 곤란한, 디저트로 마시는 와인이 나에겐 풍부한 향과 농축된 듯한 무거운 질감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포르투의 포트와인 또한 디저트와인으로 나름 유명하지만 이런 와인이 있는 줄도 모르다 비행할 때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Kopke의 포트와인을 와인 리스트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2019년에 포르투에 와서 샌드맨 셀러 와인 투어를 하며 처음으로 포트와인을 마셔봤는데 뭔가 달달하고 독한 레드 와인 느낌이지 내가 좋아하는 다른 디저트 와인처럼 향이 풍부하다던지 여러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경험이 아니어서 한참 잊고 있었다. 아마 그리 좋은 와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 아빠와 함께한 포르투 테일러스 셀러에서 포트와인 재발견을 하고 푹 빠져버렸네. 포트와인의 세계 은근히 재미있다.


포르투에서는 테일러스 셀러로 포트와인 투어를 가세요
탱일러스 와인 셀러와 향 시향하는 체험 공간

이번에 테일러스 와인 셀러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부모님을 위해 한국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하는 유일한 셀러였다는 것이다. 테일러스는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곳으로 그만큼 세계 여러 곳애서 오는 관광객에 맞춰 발 빠르게 아시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제공해 너무 좋았다. 대부분의 셀러들이 영어 가이드는 제공하기에 내가 듣기에는 문제없지만 이번처럼 부모님과 같이 연세가 있으시거나 영어를 못하는 친구와 함께 갈 때는 테일러스가 유일한 답안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좋았던 사실은 내 속도에 맞춰 셀프 투어를 하는 방식. 데스크에서 받은 기기를 들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원하는 지점에서 적혀있는 번호를 눌러가며 듣는 식이었다. 언제든 멈췄다 들을 수도 있고 다시 들을 수 있어 좋았는데 아쉽게도 부분 되돌리기가 안 돼서 어느 부분을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오디오 설명이 꽤 자세해서 길이감이 있기에 중간 되감기를 가능하게 오디오가 수정된다면 정말 최고일 것 같다. 세 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와인에 날 수 있는 다양한 향들을 직접 테스트해 보고 무엇인지 맞추는 체험형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보고 듣는 걸 떠나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빠랑 누가 맞추나 오크통에 준비된 시향에 대해 내기해 가며 꽃들, 꿀, 견과류와 과일향을 맞추며 깔깔 웃다 나왔다. 네 번째로 좋은 점은 와인 테이스팅하는 곳의 아름다움과 전문성이었다. 오크통이 있는 곳과 박물관에서의 관람을 마치면 정말 잘 정돈된 예쁜 정원으로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서 야외 테이스팅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물론 실내에도 넉넉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지만 이날처럼 화창한 날에 예쁜 정원에서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마시는 포트와인은 모든 경험과 맛을 더 값지게 느끼는데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예쁜 정원에서 3가지 포트와인을 시음했다


우리는 TAYLOR’S Chip Dry – Extra Dry White Port (화이트 포트), TAYLOR’S Late Bottled Vintage 2019 (레드 포트, LBV), TAYLOR’S 10 Year Old Tawny Port (토니 포트)를 마셨다. 친절하고 전문적인 서버가 화이트 포트는 보통 식전주로 마신다는 것, 빈티지 레드 포트는 루비와 가까운데 타우니와 비교해서는 타닌감이 있고 조금 더 젊은 느낌이라는 것, 타우니는 오크통에서 장기 숙성돼서 견과류, 캐러멜 향이 더 잘 난다고 알려주었다. 아빠와 나의 공통된 선택은 바로 10년짜리 타우니 포트 와인이었는데 풍부한 과일향이 나면서 동시에 너티하고, 캐러멜 맛도 나는 게 복잡한 거 좋아하는 우리에게 재밌는 맛이었다고나 할까. 양도 정말 넉넉하게 담아줘서 결국 3잔을 다 못 먹고 나올 정도로 아낌없이 주니 25유로(3만 9천 원)라는 투어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타우니는 10년 산에서 40년 산으로 갈수록 와인 색깔이 적갈색에서 점점 더 옅어져 노랗게 호박색으로 맑아지고, 맛은 말린 과일향이 진했던 게 높아질수록 캐러멜 향을 더 담는다고 하니 너무 재밌지 않아? 10년 짜리도 아주 맛있는데 20년 산, 30년 산, 40년 산은 또 어떨지 너무 궁금해진다.


테일러스 포트와인 타우니는 꼭 공항에서 사세요
포르투를 떠나기 전 방문한 테일러스 샵


부모님과 함께 마셔서 그랬는지, 날씨가 좋아 그랬는지 테일러스의 포트와인 타우니의 맛이 아른거리는 게 나중에 그리워질 것 같아 포르투를 떠나기 전 테일러스샵에 방문했다. 가이아 지역 테일러스 셀러 외의 공식샵은 포르투 지역에 단 하나가 있는데 다행히 가격도 셀러와 똑같고 전문적인 직원이 상주해 이런저런 추천을 받아 선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해 준 구입은 포트와인보다도 테일러스 로고가 예쁘게 들어간, 우리가 테이스팅 했던 유리잔이었다. 나는 왜 이런 게 좋은 걸까? 커피를 먹어도 집에서 일리머신으로 뽑은 커피는 일리의 빨간 로고 커피잔에, 스프릿츠는 예쁜 아페롤 로고가 들어간 잔에 먹는 게 그렇게 행복하고 기분 좋다. 컵 2개가 들어간 게 8.5유로(1만 3천 원)라 아빠랑 같이 비교하며 먹으려고 두 세트를 사본다. 이왕 먹을 때도 기분 내며 먹어야 좀 더 느낌 나는 거 아니겠어? 멀쳔다이징의 노예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하다. 항공사 다닐 때도 항공사 로고 들어간 러기지 택이니, 유니폼 입은 방콕의 곰인형이니 참 별의 별거 다 챙겨 샀었는데 20대가 30대 된다고, 30대가 40대가 된다고 변하지 않는 게 웃기지만 난 마음에 든다. 나이 들어가며 취향 없는 사람처럼 슬픈 게 어딨겠어. 뭐라도 좋아하고 꽂히는 관심과 열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소소한 삶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반짝일 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온전히 자기만족이지 누구한테 보이기 위한 취향이 아니기에 나 혼자 낄낄낄 한 번 웃음 지을 정도의 만족감이면 이미 그 몫을 다한 거야.


호텔로 돌아와서 가방 안에 와인들이니 잔이니 다시 잘 넣어 공항에 가 체크인을 하고 가방을 보냈다. 여유 있게 공항에 들어가 면세점을 보는데 어랏? 테일러스가 다 있네? 게다가 가격도 똑같은데 여긴 15% 할인도 하네? 그렇다. 술은 공항에서 사는 게 맞다. 이탈리아는 공항에서 와인을 사려면 원가보다 기본 1.5배에서 2배가량의 가격을 받아 손이 잘 안 갔는데 여기 포르투는 공항이나 현지나 가격이 똑같고 오늘같이 가끔 면세 세일을 제공할 때는 오히려 더 저렴하네. 게다가 더 좋은 건 면세점에서 사는 물건들은 내 가방 무게에 포함되지 않으니 무게 면에서도 이득을 볼 수 있어 일석이조다. 앞으로 포르투에서 포트와인을 살 때는 현지 말고 꼭 공항에서 할인도 받고 가방 무게 걱정 없이 사는 게 좋다는 거 내 경험을 통해 말하니 우리 앞으로 그렇게 하기로 하자. 공항에서 시식도 하고 있어서 타우니 20년 산도 마셔보고 한 병 더 담아왔다. 정말 10년 산과는 또 다르게 캐러멜 향이 짙어지는 게 확연히 느껴지고 맛이 고급스러워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한국 들어갈 때 엄마 아빠랑 같이 타우니 10년 산이랑 20년 산 동시에 테스팅해 보며 포르투 이야기를 하는 그날이 벌써 기대된다. 이렇게 내 디저트와인 리스트에 포트와인이 살포시 자리 잡은 재미난 포르투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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