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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Mar 31. 2024

언니와 나의 서로 다른 용서의 문

2023년 9월 29일 순례길 25일 차, 폰페라다에서 트라바델로

2023년 9월 29일 Camino de Santiago Day 25
Ponferrada -Trabadelo : 34.1 km
출발 05:15 / 도착 14:15 , 총 9시간 걸림


우리 오늘 34km 걸었다!
사진이 밝게 나와서 그렇지 실제로는 더 어둡고 무서웠던 폰페라다 성


 말 그대로 우리 오늘 34km를 걸었다. 자랑스럽다. 폰페라다에서 트라바델로까지 9시간에 걸쳐 정말 열심히 걸었다. 일단 걷는 거리가 전과 비교 안되게 기니까 오늘은 새벽 5시 15분에 일찌감치 출발했다. 어둑한 밤에 폰페라다 성을 지나가니 으스스하다. 압도적인 크기의 성은 저녁에 보니 우와~ 소리가 날 정도로 낮보다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중세 성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데 뭐라도 당장 튀어나올 것 같아서 무섭다. 언니랑 같이 있어도 이렇게 무서운데 혼자 걸었다면 멈춰 서있다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걸었을 것 같다.

 다행히 하루를 쉰 언니의 아팠던 다리가 많이 나아졌다. 컨디션이 매우 좋다는 언니가 뒤로 안처지니까 같이 걷는 나도 힘이 덜 든다. 같이 걷는 사람이 뒤로 처지면 내 속도도 느려지고, 힘들어하는 상대의 느낌이 전이가 되어 마음도 같이 힘들어짐을 그저께 느꼈다. 한없이 약한게 사람인데 특히나 육체적 노동이 주를 이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주변에 으쌰으쌰 힘을 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가뜩이나 주저앉고 싶고, 쉬어가고 싶어지는 힘듦에 주위에서 같이 끌어내리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다행히 난 늘 든든한 응원단들과 함께한다. 비아프랑카를 지나서는 언니가 나보다 더 빨리 걷기까지 했다. 순간 속도 맞추기 살짝 버거운 순간도 있을 정도였는데 언니가 못 걷는 것보다는 빨라도 잘 걷는게 훨씬 다행이었다.


꼭 먹어야겠니, 아침 파스타?

 해가 뜨기 시작할 8시 남짓까지 참 길이 편했다. 안개가 자욱한 신기한 광경을 보며 언니와 정말 즐겁게 걸었다. 이렇게만 걸으면 오늘 34km 걸을만하겠는데? 생각을 할 정도였다. 8시 반쯤 되었을까, 작은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카페를 발견하고 아침을 하러 들어갔다. 로컬 사람들이 꾀나 많이 들리는 동네 맛집 바이브가 있는 곳이다. 나는 나폴리타나에 코르타도 한잔 마실까 해서 들린건데 언니는 벽에 붙은 메뉴를 보고 파스타를 시키려 한다. 아니 아침 8시 반이라고, 저거 메뉴에 있어도 아마 점심이나 저녁식사 때나 파는 걸꺼고, 아침에 식당에서 누가 불을 켜고 요리하겠냐고....

 그런데 바 안에서 우리를 보던 여자 사장님이 파스타 메뉴를 들고 다가오신다. 우리가 파스타 뭐라 뭐라 하는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들으시고는 다가오시더니 여기, 이 파스타, 이 파스타는 되고, 이건 안돼하며 쿨하게 짚어주신다. 그래서 우린 얼떨결에 콰뜨로 치즈 파스타를 주문했다.


유쾌하셨던 주인 아저씨와 아침 8시 반에 먹은 치즈 파스타


 말이 파스타지 8천 원인데 삶은 면 위에 치즈 소스 버무린게 다다. 그래도 다행히 맛이 없진 않다. 언니는 먹고 싶을 때 먹어주는게 이미 행복이라며 별거 아닌 파스타도 맛있게 잘만 먹는다. 그래, 너 행복하면 됐다. 언니랑 함께 걸으니 살다 살다 모닝 파스타를 다 먹는구나.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아침을 먹고 다시 출발해 본다.


언니의 용서의 문, 나의 용서의 문

 정말 예쁜 마을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면서 얼마 안 가 용서의 문에 도착했다. 그동안 용서의 언덕, 철의 십자가 등 용서나 소원에 대해서 이미 많이 생각하고 털어버리며 걸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제로 용서를 할 수 있는 용서의 문 앞에서는 그다지 큰 생각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를 할 정도로 사람을 크게 미워한 적이 언제였나 싶게 까마득하다. 그래도 문을 만져보며 나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생겼다면 용서해 달라고 짧게나마 기도를 했다. 용서의 문 앞에서 나는 내가 용서를 받고 싶었다.


드디어 용서의 문이다


 10년 전 언니는 첫 직장에서 정말 열심히 일을 했었다. 그때 나는 외국에서 승무원을 하느라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았기에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를 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런데 언니가 새벽 2시-4시까지 야근을 밥 먹듯 했기에 새벽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시간이 나에겐 딱 저녁이라 그때 참 통화를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새벽 야근을 몇 년 하던 언니는 병원에서도 이러다가 호르몬 불균형이 너무 심해진다고 목숨 써가며 일하는 거라는 경고까지 받을 정도였다. 너무나 힘들었던 직장을 그만두고 언니는 산티아고로 떠났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나 용서의 문에 다다른 뒤 나에게 그날 말해준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 그 두 사람은 끝내 용서하지 못했어."

 직장에서 능력도 없고 일도 안하면서 부하 직원들을 정말 많이 괴롭히던 언니의 상사 두 명. 사내에서도 못된 행실로 유명하지만 회사라는게 윗사람을 그리 쉽게 자르는 구조는 아니기에 용케도 살아남는 악질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딜 가도 늘 존재하는 것 같다. 많이 고생했던 언니를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난 용서 안한걸 잘했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언니와 함께 실컷 웃었다.

 "용서의 문에서 용서를 못한 사람이 있다니, 이 이야기가 더 인간적이다야."

 난 언니의 산티아고 무용담 중에서 이 이야기를 제일 좋아한다. 우리 모두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성자가 되자고 시작하는 길은 아니니까. 이 길을 통해 언니는 자신의 한계도 마주하고,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철칙들을 다시 새기고 왔을 것이다. 그 상사 두 명을 용서 못했던 이유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란다. 능력 없는 상사야 어디 한둘이랴. 언니는 예나 지금이나 도덕과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 또한 참 변하지 않는게 난 좋다. 용서의 문에서 언니가 용서 안하기로 결정한 그 용기가 참 언니 다워서 이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람들이 각자 세상을 사는 기준과 마진, 그리고 그것들을 마주할 용기와 어쩌면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발견 가능한게 순례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교훈과 감상을 남기기에 내가 얻은 교훈이 꼭 다른 사람에게도 같을 수는 없다. 언니와 나의 용서의 문은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가 재확인하는 것 같다. 가끔은 '의외로 나의 산티아고가 너무 순탄한 걸까? 더 고민이 있을 때 걷는게 더 좋았으려나?'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난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안고 걷지 않아서 너무 행복하다. 고민이 없이 걷는 한걸음 한걸음의 가벼움에 감사함으로 마음이 벅찰 때가 있다. 다행이다. 내 순례길 무용담 중에는 그럴듯한 용서와 고민해결 등의 드라마는 없지만 난 지금 내 식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행복하게 즐기고 있다.


예쁜 마을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소
조용하고 참 예쁜 마을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소


 스페인 하숙으로 유명해진 장소인 빌라 프랑카를 지나가는데 너무 예뻐서 아차 싶었다.

 '여기서 하루 묵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한국인 사이에서는 유명한 도시인데 나는 원체 한국 프로를 안보기 때문에 스페인 하숙이 뭔지도 모르고 있던 차였다. 만약에 내가 미리 알았다면 여기서 예쁜 마을과 풍경을 만끽하며 분명 하루 자고 갔을꺼다. 뭐 다음번이 또 있지 않겠어? 뭔가 아쉬운게 있으니 그 핑계로 산티아고를 한번 더 걷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예쁜 마을을 열심히 눈에 담는 수밖에! 하며 걷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보인다. 바로 J씨다.

 너무 반가워서 달려갔다. 어제 이후로 다시 못 볼 것 같았는데 인연이 있는지 여기서 또 만난다. 알고 보니 어제 J 씨가 내일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물었을 때 우리가 5시쯤 갈 것 같아요 한 걸 기억하고 일부러 본인도 5시에 일정을 시작한게 아닌가. 아고... 우리 15분 늦게 출발했는데 연락해서 같이 갔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한테 부담 될까봐 그냥 혼자 걸어온 거다. 그래도 여기에서라도 만난게 어딘가. J 씨는 오늘 빌라 프랑카 여기까지 걷기 때문에 일정이 다 끝났다. 아쉬우니 다 같이 앉아 띤또 데 베라노를 한잔 같이 하기로 했다. 광장에 보이는 바 중에 J 씨가 얼른 서칭을 해서 나름 평점 좋은 곳의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더운날 띤또 데 베라노는 언제나 진리다


 "여기가 스페인 하숙에서 자주 나오는 그 광장이에요."

 J 씨의 설명은 언제 들어도 참 유용하다. 그렇게 유명한 줄 알았으면 좀 보고 올 걸 그랬나? 개인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TV 쇼로 유명해지는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나다. 삶의 어떤 뜻을 구할 때, 본인이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찾게 되는 이 길을 누군가가 연예인들이 나오는 쇼를 봤는데 좋아 보여서, 예뻐 보여서 오지 않았으면 했다. 뭔가 가공된 로망이라고나 할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길이 돼버리지 않았으면, 조금의 미스테리를 더 오래 간직했으면 했다.

 술을 한잔하고 있자니 메구미도 도착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여느 때보다 더 반갑다. 막 도착한 그녀가 좋아하는 시원한 맥주를 한잔 시켜주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2시간은 더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일주일 내내 30km를 넘게 걸을 것이고, 이들은 조금 덜 걸으며 마지막 콤포스텔라에는 2일 차 간격을 두고 서로 도착하게 될 정도로 벌어진다. 그렇기에 오늘의 짧은 만남은 선물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시작했던 모험이 이제 일주일 남짓밖에 안 남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더 안전하게, 더 행복하게 잘 걷자!


1만 2천 원짜리 너구리 라면

 비아 프랑카를 지나 트라바델로로 출발했다. 정말 높은 산 안에 둘러싸인 도시라 트라바델로까지 가는 내내 울창한 숲 안에 만들어진 평평한 도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어 의외로 쉬웠다. 2시간 내내 푸릇푸릇한 높은 숲에 쌓여 걷다 보니 반지의 제왕 원정대가 된 듯한 기분이다. 숲이 어마어마하게 높아 우리가 정말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역시나 12시가 지나니 해가 뜨겁고 그늘이라고 해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지치는 걸음을 재촉하자고 언니와 뮤지컬 아이다를 들으며 신나게 따라 부르며 갔다. 1부, 2부를 다 듣고 나서야 오늘의 목적지 트라바델로에 도착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고속도로 옆에 덩그러니 있는 작 작은 마을이구나. 슈퍼마켓도 없지만 오늘 묵는 숙소가 큰 레스토랑과 바를 운영하기에 다행이구나 싶었다.


 언니가 자기가 9년 전에 저기서 모히또를 마셨다고 숙소 뒤에 있는 조그만 식당으로 날 데리고 갔다. 기억할 만도 한게 오늘부터는 모든 일정이 다 언니가 걸었던 거리 그대로 짠 거니까. 이곳에서 신기하게도 한국라면 너구리를 팔아서 언니와 함께 점심으로 너구리 라면을 한 그릇씩 먹었다. 1만 2천 원짜리 라면이지만 밥도 나오고, 외국인 사장님이 만든 양배추 김치도 나왔다.


안녕 오랜만이다 너구리야


 언니는 신이 나서 이곳 사장님에게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9년 전에 여기 왔었다고 말한다. 사장님도 9년 전에도 자기가 운영했다면 신기하다고 맞받아 치신다. 이 모습을 보니 사람은 영락없이 추억을 먹고사는 동물인가보다 싶다.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도 매일 그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볼 추억을 만드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언니와 트라바델로에서 1만 2천 원짜리 너구리 라면을 먹은 추억을 만들었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다니, 맛있는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9일 트라바델로의 Nova Ruta

가격: 개인실, 60유로 (8만 6천 원)

구글평점 4.1, 내 평점 4.2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고속도로 초입구. 마을이랄 게 없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마도요.

나의 경험 : 1층에 큰 레스토랑과 바가 있어서 편리하다. 작고 컴팩트한 방과 작은 침대, 작은 화장실이라 딱히 좋다는 생각은 안들지만 불편하진 않은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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