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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Apr 02.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주제가는 이제부터 장기하야

2023년 10월 1일 순례길 27일 차, 폰프리아에서 사리아

2023년 10월 1일 Camino de Santiago Day 27
Fonfria - Sarria : 33.18 km
출발 05:24/ 도착 12:34 , 총 7시간 10분 걸림


10월이다, 해드랜턴 챙기자

 9월 5일에 순례길을 시작해서 벌써 달이 바뀌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매일 나름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아쉽지는 않다. 어제 큰 위로를 받은 폰프리아를 뒤로하고 사리아로 가는 길을 시작한다.

 폰프리아에서 시작하고 내리 2시간은 어둠 속에서 가파른 돌길만 있기에 정말 조심해가며 걸었다. 사람들이 헤드랜턴을 가지고 다니는데 호불호가 있다고 하는데 오늘 같은 길을 생각하면 헤드랜턴은 산티아고 순례길 필수템이 아닐 수가 없다. 길은 좁고 가파르고, 내 헤드랜턴 하나로는 언니의 발 한 치 앞까지 커버할 수가 없기에 각자 자기 발 닿는 곳을 정확히 스팟팅해가며 걷는 게 참 중요했다. 낮에 돌길을 내려가는 거랑 새벽 어두울 때 돌길을 내려가는 건 천지차이고 그 위험부담도 몇 배는 더 크다. 매일 잘 써왔지만 오늘처럼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등에 식은땀이 나고 고마워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해드랜턴 덕분에 안 다치고 잘 내려왔어! 10월에 들어서니 해도 늦게 뜨기에 필요도가 더 올라간다. 괜찮은 해드랜턴 하나가 부상을 예방할 수 있으니 나는 정말 꼭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이라 생각한다.

 폰프리아에서 사리아로 들어가는 길 중간엔 산코스인 산실코스와 얼터네이티브 길이 있는데 우린 오늘 얼터네이티브 길을 선택해 걸었다. 아직도 거리가 길다는 것에 심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는데 그래도 어제보다 1시간 정도는 짧다는 희망 하나로 충분히 힘이 난다.


산티아고 주제가는 이제부터 장기하야
오늘도 길들이 참 멋있다


 아니 근데 우리 언니는 왜 이렇게 잘 걷는 거야? 회사일 외에 운동이란 하지도 않는 언니가 일찍 다치거나 힘이 달려서 못 걷거나 발바닥이 아파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너무 잘 걷는다. 너무 다행이지 뭐야. 27일째 걷고 있는 내가 오히려 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오늘은 언니가 산티아고 플레이 리스트라고 준비해 온 음악을 들으며 걸었는데 순례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GOD의 길'을 들으니 캬~ 소리가 절로 난다.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건 니 생각이고'는 웃음이 날 정도로 사이다 같은 가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게 아니라 그냥 길이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 그냥 니 갈 길 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러쿵저러쿵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냥 니 갈 길 가

 

 아마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내 마음이 이렇지 않나 싶다. 걷다 보면 나중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하고 그냥 걷는 거지 거창하게 운명이나 비장한 각오를 갖고 확신에 차서 걷는 건 아니니까 이런 가사가 참 마음에 들었다. 장기하의 말대로 그냥 내 갈 길을 가본다.


도네이션 바 Terra de Luz
히피 분위기 넘쳐나는 자유로운 도네이션 바


 4시간쯤 걸어 우연하게 마주친 도네이션 바 테라 데 루즈. 여기는 히피 분위기가 정말 만연한 또 다르 세상이었다. 5일 전에 만났던 탁 트인 광경의 최고의 도네이션 바 라 카사 데 로스 디아세스와 비교하면 여긴 집 안처럼 반 실내에 꾸며진 곳이랄까. 가방에 달 수 있는 조개를 꾸미는 스탠드도 있고, 말린 허브들을 담아갈 수 있는 곳, 명상과 요가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음식은 많지 않았지만 곳곳에 의자들도 많이 마련돼있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쉬어가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실은 카페인 줄 알고 언니와 들어갔지 도네이션 바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걸어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미리 알지 못하면 모르고 지나가는 숨은 보석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구글 지도에 아예 위치가 잘 명시되어 있기에 얼른 찍어서 내일쯤이면 이곳을 지나갈 J씨에게 꼭 들려보라고 보냈다. 바나나도 먹고, 주스도 마셔보고 우리도 잠깐 짐을 내려놓고 쉬어본다.


사리아에서 1유로 타파스와 4유로 와인 한 병

 오늘은 신기하게도 온갖 동물을 보며 사리아에 도착했다. 황소, 강아지, 고양이, 젖소, 검은 말 흰말 등등 동물농장 같았던 하루였다. 동물의 신이 사리아를 보호하는 건지 뭔지 정말 끊임없이 튀어나왔던 동물들을 만나가며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사리아에 짐을 푼 뒤 언니와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다. 여러 번 말할 정도로 중요한 게 스페인은 거진 모든 레스토랑에 브레이크타임이 있어서 점심 먹고 싶으면 최소 3시 전에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줘야 한다. 아니면 저녁때까지 굶어야 한다 작은 타파스바 Barullo에서 타파스 4개를 시키고 콜라에 끌라라 한잔을 했다. 계산을 하려니 이거 가격이 너무 저렴한게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데 언니가 조언을 준다.

 "더 시켜봐 봐. 그리고 계산하면 답이 나오겠지.“


스테이크 타파스가 정말 맛있었다


 언니 말대로 맛있었던 스테이크 타파스 4개랑 고추튀김 3개를 추가로 더 시켜봤더니 7유로만 나온다. 이게 맞나 싶어 종업원에게 가격을 물어봤더니 점심 시간대에는 모든 타파스가 다 1유로란다. 아, 이런 멋진 가게가 있나! 이런 줄 알았으면 난 고기만 시켰지. 둘이 맛에 한 번 반하고, 저렴한 가격에 반해 타파스만 10개 넘게 먹고 나왔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들어갔는데 1유로라니 만족감 최고였다.

 

 숙소에 돌이와 씻고 한참을 쉬다가 이제는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가봤다. 순례길에서의 일정은 걷고 먹고 쉬고를 반복하는 단순하게 그지없는 루틴이지만 오늘은 사리아라는 도시 자체가 규모가 있는 모던한 곳이라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다. 나는 난데없이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어져 근처에 식사도 할 수 있으면서 디저트 메뉴에 치즈케이크가 있는 곳을 찾아 A traversia dos Sonos에 갔다. 작은 입구와는 다르게 홀 하나를 지나면 널찍한 정원에 1, 2층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2층에 자리 잡았다. 아직 6시쯤 이른 저녁이라 주방을 안 열었다고 기다리라고 해서 와인 리스트먼저 받아 훑어 보기로 했다.

 흠... 와인이 한 잔에 4유로? 스페인의 소도시 치고는 비싼 것 같지만 뭐 관광지라 그런가 싶어 언니한테 내가 일기를 쓰는 동안 화이트와인 한잔만 좀 가져다주겠냐고 부탁했다. 그런데 몇 분 후에 언니가 와인 한 병을 들고 올라온다.

"한잔에 4유로가 아니라 한 병에 4유로래."


아무리 하우스 와인이어도 병에 4유로라니!


 아! 이게 스페인 플랙스지! 맛도 너무 좋았다. 언니나 나나 술을 자주, 많이 마시는 스타일도 아니고 달달한 칵테일이나 디저트 와인을 선호하는 편인데 스페인에서 음식과 곁들여 먹는 와인들은 어쩜 하나같이 맛있다. 전체적으로 스페인 와인들은 씁쓸하거나 텁텁한 맛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누구에게나 쉽게 소개할 수 있는 와인 같아서 우리 같이 와인을 잘 안 마시는 사람들도 참 맛있다고 느낄 수 있어 좋다.

 언니와 함께 와인 한 병을 깔깔대며 다 비웠다. 중간에 우리가 시킨 가리비 요리와 치즈멜티드 토스트도 나왔고, 내가 먹고 싶었던 치즈케이크도 맛있었다. 우리가 자리 잡은 2층에 아무도 안 올라와서 홀 전체를 전세 낸 듯이 둘만의 세상에 있는 것 같아 편하고 좋았다. 7시가 지난 시간이지만 아직도 따뜻하게 내리쬐는 해가 나긋한게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언니가 자기는 스페인에서 이리 7~8시에 술 마시고 돌아다닌 기억이 없다고 한다. 저녁에 밖에 나와 다른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잔 기울이거나, 좋은 메뉴를 시켜본다거나 이런 현지인 같은 경험을 못해봤다고 지금 참 행복하다고 한다. 늘 걷는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저녁을 마치고 나면 자기 바빴는데 이렇게 길어진 해를 벗 삼아 좋은 음식, 좋은 술을 해가며 우리 둘이 스페인에 함께 있다는게 신기하단다. 언니와 와인, 음식들, 뒷배경을 뇌리에 남게 멘탈 픽처를 찍어본다. 큰 공간에 우리 둘이랑 햇볕만 가득했던 2023년 10월의 첫째 날 산티아고의 사리아. 오래 기억에 남기고 싶은 참 평화로운 순간이다.

 언니와 나와서 교회 근처를 걷고, 강변 근처에도 가본다. 늦은 저녁을 먹는 스페인 사람들이 거리로, 레스토랑으로 나오는 시간이라 더 현지 바이브를 느낄 수 있었다. 젤라또도 하나 사 먹고 슬리퍼를 끌고 둘이 실실 거리며 돌아다니며 그렇게 소소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리아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10월 1일 사리아의 Baixo a Lua

가격: 개인실, 60유로 (8만 6천 원)

구글평점 4.9, 내 평점 4.9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마을 가운데 위치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꼭 다시 들릴 거예요

나의 경험 : 역대급 친절한 사장님, 역대급 파워풀한 샤워기. 이 둘만으로도 갈 값어치가 충분하다. 샤워기는 약간 마사지 기능처럼 곳곳에서 물이 나오는거라 나중에 이사하면 같은 샤워기를 달고 싶어 사진까지 찍어왔다. 수압 세고 온도 뜨끈하고 정말 욕실에서 나오기가 싫었을 정도. 언니나 나나 여긴 샤워기 하나로도 평점 5.0 줘야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시고, 다들 개인룸에 룸이 10개 정도밖에 안 돼 조용하고 깨끗하다. 시설도 다 새것 같고 물도 제공해 주고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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