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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Apr 03. 2024

순례길에서 친언니와 싸우고 혼자 걸어봤니

2023년 10월 2일 순례길 28일 차, 사리아에서 곤자르

2023년 10월 2일 Camino de Santiago Day 28
Sarria -Gonzar : 30.57 km
출발 05:30/ 도착 12:20, 총 6시간 50분 걸림


나 오늘 언니랑 싸우고 혼자 걸었다
사리아에서 시작은 좋았지. 별도 보고 손잡고 걷는 예쁜 커플도 보고


 친언니랑 순례길에서 싸운 사람. 나야 나. 우리 둘 다 만 나이 39살에 내년이면 마흔인데 자매는 나이가 들어도 싸운다. 발단은 예상치도 못한 신박한 이유에서 생겼다. 걷기 시작한 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끝이 없던 언덕길을 오르던 중이었다. 언니에게 잠시 폴을 들어달라고 하고 짐 재정비를 한 뒤, 앞서가는 언니에게 폴을 돌려달라고 서 달라했다. 오늘은 언덕들이 좀 많고 오르락내리락 상당히 지치는 길들이긴 했다.

 "나 지금 힘들어서 멈추면 못 걸을 것 같아, 네가 얼른 와서 받아가"

 근데 정말 지금 생각해도 웃긴게 나도 언덕길을 오르는게 너무 힘들어서 당장 폴이 있었으면 했다는 거.

 "폴 없어서 못 따라잡아. 내 폴 좀 줘, 나 힘들어." 이랬더니 언니가 내 폴을 땅에 내려놓고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응?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바닥에 내려진 폴을 주으러 고개를 숙이는 것도 참 힘든 길인데 일단 자매여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버리는 자체가 난 굉장히 무례하다고 느꼈고 이해가 안갔다. 물론 몇 시간을 이미 걸은 상황에서 각자 몸도 힘들고, 예민해져 있기도 하고, 아마 자매니까 이해하겠지 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 탓도 있으리라. 그래도 땅바닥에 물건을 내려놓았다는 거에 기분이 너무 나빠 거리가 좁혀졌을 때 말했다

 "네가 폴을 땅에 두고 간 건 잘못한 것 같아. 사과해."

 사과하라는 건 우리 사이의 코드다. 빈 말이건 아니건 일단 사과를 들으면 나의 공식적인 불평이 수렴되고, 허울뿐이라도 한쪽이 잘못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더 이상 불평할 이유가 없어진다. 보통은 언니가 미안하다 하고, 나중에 기분이 좋을 때 다시 이야기를 꺼내 제대로 푸는 우리 사이인데 몸이 한참 지쳐있으니 둘 다 마음이 좁아지고 뾰쪽해진 것 같다.

 "사과하라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언니는 자기가 잘못한게 없다고 한다. 물론 오르막길에서 페이스가 끊기지 않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는 한다만 우리 둘 다 이 사소한 일을 웃으며 받아들이기엔 이미 제정신의 평온함은 없는 것 같았다.

 속된 말로 빡이쳐서 언니를 지나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나보다 잘 걸을 것 같아?'

 지금 글을 쓰면서도 너무 웃기다. 아... 그게 뭐라고...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빨리 걸어 본때를 보여주리라 엄청 빨리 걸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죽고 못사는 자매임을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고 싶다. 그런 우리도 마흔이 다 되어서도 이렇게 유치하게 싸운다.


안녕, 포르토마린아. 넌 다음에 볼게

 오늘 우리의 계획은 사리아에서 곤자르로 들어가기 전에 예쁜 도시 포르토마린에 들려 좋은 식사를 하는 거였는데 하필 이 전에 딱 싸웠다. 포르토마린에 들리기위해 다른 마을 하나 들리지 않고 계속 걸어왔는데 이걸 어째. 전속력을 내어 쉬지 않고 훅훅 걸어 나갔다.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다리 앞까지 한 시간을 걸었을까? 잠시 신발끈을 묵는 사이에 어느새 언니가 내 뒤로 다가와 사과를 한다.

 "야, 미안해..

 나야 당연히 언니가 사과할 줄 알았지. 근데 여기서 또 생각지도 못했던 골 때리는 나의 대답이 나간다.

 "응, 싫어."

 아... 유치해. 우리 원래 이렇게 말하지도 않는데 몸이 지칠 때 서로에 대한 실망감도 몇 배로 커지고, 서로를 받아줄 인내심이 제로가 돼 가는 걸 바라보는것도 속 터진다.

 이번엔는 언니가 열받아서 나를 지나 빠르게 전진한다. 오늘은 이렇게 끝나겠구먼... 우리는 곤자르에 도착해서나 얼굴을 보겠군요....

 거대한 포르토마린의 다리를 지나는데 무섭기까지 할 정도로 높이가 상당하다. 저 멀리 풍경들이 비현실적인 입체감에 동화같이 비추는 햇살이 꼭 꿈만 같다. 꼭 포르투갈 포르토의 생 루이스 다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 감상을 나눌 사람은 우리 언니 밖에 없는데, 우리 둘 다 포르토 참 좋아하는데.... 아쉬우면 뭘 해 언니는 몇십 미터 앞에서 이미 포르토마린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다리 위에서 본 풍경이 정말 가능이 안되게 멀고 깊다


 저 멀리 계단을 올라가던 언니가 조금 뒤에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인다. 그러더니 오른쪽 도로를 타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잠시 지도를 확인하는데 어떤 내 또래 미국인 여자가 언니와 다른 왼쪽길을 타고 걸어가려 하길래 확인차 물어봤다.

 "지도에서는 저 길이(언니가 걸어가고 있는 길) 맞다고 나오는데 너 왼쪽으로 가?"

 "응, 지도에 길 2개가 나오는데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더 짧다고 나오네."

 뭐 빠르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 친구와 같은 길로 가기로 했다. 잠시 언니 쪽을 쳐다보니 소리를 질러 길을 알려주기에는 너무 멀리 있고, 전화를 해서 먼저 말을 걸기에는 자존심이 상해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다른 길로 걷기로 하고 움직이려니 되려 레이첼이라는 이 미국인이 나에게 물어본다.

 "저기 네 친구 아니야? 안 가르쳐줘도 돼?"

 "아, 우리 언니야. 괜찮아. 우리 방금 싸웠거든. 돌아가라지 뭐."

  이렇게 말하고도 레이첼과 한참을 웃었다. 내가 언니한테 우리 간식 다 있다고, 대신 난 언니 선글라스와 선크림이 나한테 있지! 하고 농담하니 자기 사과랑 다른 음식 좀 있으니 필요하면 나눠주겠다고 한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스윗한 것 같다. 둘이 나이가 비슷해서 40을 바라보는 지금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걸었다.

 어차피 위험한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곤자르에서 언니를 당연히 만날 꺼기에 에이~오늘은 그냥 일이 이렇게 풀리나 보다. 둘 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 하고 곤자르까지 걸었다.


일단 식사 먼저 하실게요


야 어디야, 빨리 와. 여기 먹을 거 많다. 고속버스 휴게소 같아


 도착 후에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메뉴판 사진도 함께 보낸다. 5분 안에 도착한다는 답이 왔는데 실제로는 20분 정도 더 뒤에 도착한 것 같다. 막 도착한 언니한테 시원한 물 한잔을 권하고 메뉴를 함께 골라 식사를 했다. 일단 우리가 싸웠던 일에 대해서는 둘 다 속 시원히 해결할만큼 같은 감정선상에 도달했는지 모르니 그 토픽은 빼고 다른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와중에 여기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약간 고속버스 휴게소 스타일인데 숙소와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해서 이곳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정말 좋은 옵션이었다.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이 났는지 가만히 앉아서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먹고 가는 건 물론이고, 다른 곳에 머무는 사람들도 짐 없이 음식만 먹으러 단체로 많이 들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단품 메뉴의 종류가 정말 많고, 가격들도 저렴해서 언니와 신나게 이 메뉴 저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완전 우리 스타일!


음식들이 어쩜 하나같이 다 맛있니


 돼지 목살구이와 감자튀김이 7유로, 정말 한 바가지 나오는 고추튀김 6유로, 리뷰에서 꼭 먹으라고 사람들이 추천해 준 베이컨이랑 계란 4유로, 여기에 디저트로 커피맛 플란 3.5유로. 와 여기 베이컨 진짜 두툼하고 잘 구워진게 내가 먹은 베이컨 중에 가장 맛있었다. 비계하나 없던 돼지구이도 너무 맛있었고 양이 푸짐해서 다 못 먹을 정도라 가격대비 양이랑 품질 다 좋았다.

 저녁에는 우리가 숙소에 묵으니 컵라면에 물 좀 부어달라고 해서 아껴놨던 새우탕면이랑 김치 신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늦은 시간 출출할 때쯤엔 식당에서 맛있었던 커피 플란에 치즈 케이크를 하나 더 시켜서 아메리카노에 맛있는 간식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자매아이가

 한숨 낮잠도 자고, 빨래도 하고 모든 식사와 간식을 끝낸 뒤 저녁에 언니랑 오늘 낮에 있었던 다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언지 없이 땅에 폴을 내려둔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한다. 자기가 너무 힘들어서 멈추는 즉시 더는 못 걸을 것 같아서 멈출수가 없었단다. 그 느낌 나도 알지. 대신에 내가 "사과해!" 이렇게 시간도 안 주고 다짜고짜 강요하는 부분에 대해 욱하는 감정들이 생기니 앞으로는 시간을 주고 좀 지양해 달라고 하더라. 뭐 상대가 싫어하는 표현을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으니 원한다면야 앞으로 안쓰겠어.

 여하튼 밖에서는 더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조심하는게 맞는 거다. 정말 가까운 가족일수록 예의를 더 잘 지켜야 한다. 편한게 좋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느끼는 순간 서로를 더 잘 아는 사이기에 순간 남보다 더 못되게 굴 수도 있다. 우리 둘은 싸울 때마다 꼭 미안하다, 잘못했다 사과를 하고 공식적으로 마무리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사소한 일로 싸우게 되고, 사과하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는 걸 둘 다 잘 안다. 그래도 우리는 자매다. 나는 언니가 아프다면 내 신장이고 간이고 다 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언니가 소중하다.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아끼는 사이이기에 우리가 지금 이 산티아고 순례길도 같이 걷고 있는 거니까. 그 정도로 친한 우리가 오늘 폴 하나를 두고 씩씩거렸던 게 참 모지라서 나중에 두고두고 기억을 할 것 같다. 바보야 뭐야.... 하필 모자란 순간에 둘 다 똑같아요....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


이제 산티아고 여정이 100km도 안 남았데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 남음을 알려주는 비석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 남았다는 비석이 있는 포인트를 지나왔다. 엄청 특별하다고 막 즐겁고 그러진 않았지만 여유롭게 비석 옆에 앉아 사진도 찍고 나름의 의미를 되새겨보려 했다. 아직도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고, 100km 밑으로 90km, 80km 이렇게 조금씩 줄어간다는게 실감이 안난다. 그래서 나에겐 순례길을 다 끝내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비석들이 그저 숫자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800km가 남았든 100km이 남았든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똑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음에 걸으면 더욱 즐겨야지! 하는 생각은 멈추지가 않는다. 첫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벌써 두 번째 산티아고를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니 내가 아주 극한까지 내몰아 쳐지지는 않았구나싶어 웃음이 난다. 다시 오게 되면 처음 시작하는 막막함에서 오는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모든 구간은 24km 정도로 짧게 기획해서 편하게 걸으리라 다짐한다. 체력을 밀어붙이면 더 갈 수는 있지만 전날에 걱정이 몰려오며 중압감을 느낀다. 시작하면 끝이 나긴 하지만 새벽 선선할 때 얼른 많이 걸어 더워지기 전에 진도를 빨리 빼놔야지! 하면서 마음과 발걸음이 서둘러지는게 가끔은 안타깝다.

 다음번 산티아고는 매일을 천천히 걸으며 길과 걸음의 의미를 새길 수 있도록 짧은 거리, 느린 호흡으로 가야지. 그래도 순례길을 걷는 나의 속도와 성향, 내가 가장 많은 걸 즐기고 담을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정의가 생긴 것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번 길에서는 앞 20일 동안 마지막 7일 긴 거리를 걷는 것에 대한 걱정을 참 많이 했다. '아~ 언니가 와서 이거 같이 걸을 수 있는 거 맞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런 불안한 생각들을 안고 걷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너무나 소중한 길이라는 것도 깨달아 간다. 가능한 즐겁고, 행복한 길이어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과연 이런 대경험을 몇 번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주위를 통틀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은 우리 언니 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만큼 지금 걸음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하고, 가능한 즐거움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아, 그리고 오늘 언니랑 싸운 걸 털어놓은 김에 하는 말인데 난 다시 와도 우리 언니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늘 말하지만 나의 소울메이트는 우리 남편이 아니라 우리 언니다. 내 폴을 땅에 두고 먼저 간 언니야, 그래도 난 널 사랑한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10월 2일 곤자르의 Hosteria de Gonzar

가격: 개인실, 48유로 (6만 9천 원)

구글평점 4.2, 내 평점 4.3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근처에 건물이 이거 하나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오! 개인실이라고 받아서 들어갔는데 침대가 4개다! 여긴 단체들도 자주 와서 그렇게 구성돼있는 것 같다. 욕실의 샤워코너가 그냥 샤워커튼으로만 나눠져 있어 조금 디테일한 부분이 떨어지긴 했지만 일단 방 넓고 침대 많고, TV에 넷플릭스도 연결할 수 있어서 영화도 보고 푹 쉬었다. 큰 규모의 식당이 복도만 따라 나가면 바로 이어져 있어서 언제든 먹고 싶은걸 다 먹을 수 있어 접근성 최고. 한국인들이 좋아할 단품 메뉴 종류가 정말 다양해서 고르는데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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