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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Apr 01. 2024

순례길태기와 영혼을 위한 치킨수프

2023년 9월 30일 순례길 26일 차, 트라바델로에서 폰프리아

2023년 9월 30일 Camino de Santiago Day 26
Trabadelo - Fonfria : 33.18 km
출발 04:45 / 도착 13:30, 총 8시간 45분 걸림


악! 26일 중에 제일 힘든 날이었다!
새벽 일찍 길을 시작한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걷기 시작하고 2-3시간이 지나도 왼쪽 발 물집들이 계속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보통은 걷기 시작하고 30분 정도가 지나면 고통도 익숙해지고 둔해지는데 오늘은 매 걸음이 너무 아팠다.

 '안되겠다, 이렇게 8-9시간 걷는 건 불가능하다.‘

 계속 이 생각만 하면서 걸었다. 오늘 넘어야 하는 산도 있어서 하루 종일 그저 막막한 마음만 들었다. 총 8시간 45분이 걸린 하루. 정말 마지막 2시간 정도를 앞두고도 눈앞에 택시가 보인다면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물론 산길에 택시가 지나갈 리가 없지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걸은 요상한 하루였다. 어제와 같은 하루일 뿐인데 오늘은 몸이 너무 무겁고 다리도 아프고, 정말 말한마디 하기 싫을 정도로 기분이 다운되는게 '혹시 내가 어디 아픈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난 25일을 참 건강하고 재밌게 걸었는데 오늘은 이유가 없이 내가 너무 이상한거지. 게다가 길 자체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야. 시간이 너무 안가서 지금도 내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오늘 길은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례길태기라고 들어보셨나요

 어제부터 30km 이상씩을 걸은게 이미 짜놓은 계획이라 어쩔 수는 없지만 이 계획을 추천한 언니가 원망스러웠다. 근 9시간씩을 걸으니 피로도 쌓이고 물집들도 생기고, 걷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즐거움과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다. 걷는게 고행이 되어가며 생각도 못하겠고 웃음도 안나는 이 상황이 적잖게 당황스럽다.

 지금 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라는 말의 정반대를 경험하고 있다. 몸이 아프니 그냥 정신도 같이 들어 누운 느낌이다. 이게 단순하게 오늘 하루만 걷는 거라면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텐데 한달이 넘게 매일을 걷는 장기전이라 어째 손을 쓸 수가 없다. 몸의 컨디션은 순례길에서 아주아주 중요하다. 오늘은 건강한 내 몸이 나를 배신하는 느낌에 질려서 걸었지만 한 달간의 일정 중에 하루정도 권태기가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애써 긍정적인 마음을 먹어보려 애썼다.

 사람들은 순례길에서 기분이 바뀌거나 뭔가 답답한 순간이 오는걸 순례길태기라고 부른다 한다. 순례길과 권태기가 합쳐진 말이다. 오늘이 나의 순례길태기였던 것 같다. 단지 오늘 하루로 끝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힘이 번쩍 났으면 좋겠다.


언니야 미안하다, 사랑한다
풍경은 너무 예쁜데 내 마음은 안예뻤던 순간


 오늘은 언니가 나를 하드캐리해서 끌고 오다시피 했다. 진짜 난 너무 걷기가 싫었다. 발 아픈 기분도 지긋지긋하고 기분이 너무 안좋아서 불평도 많이 하고 느리게 걸었다. 그 와중에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역대급으로 아름답다.

 '아파 죽겠는데 경치는 또 이쁘고 난리야.‘

  아주 심술이 제대로 났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대자연을 실컷 즐기고 눈과 마음에 담기에 내 마음이 너무 작아져 있었다. 이 순간을 못 즐기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더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언니는 잠깐 서보라고, 이런 경치 흔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나를 불러 세워 사진을 찍는다. 웃음이 안나와 뒷모습만 잔뜩 찍혔지만 언니는 날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언니 덕에 폰프리아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이게 언니라는 익숙한 존재가 있으니 짜증 부릴 사람도 있고, 엄살 부릴 사람이 생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나 혼자서 걸었다면 어찌해야 내가 건강하게 도착지에 잘 도착할지 마인드부터 다시 셋팅하고 묵묵히 걸어 냈으리라. 언니한테 너무 고마웠던 하루. 언니야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예쁘긴 하다


역대급 힐링의 커뮤니티 디너
오늘 하루도 열심히 주인과 함께한 신빌과 폴도 쉬는 시간


 오늘 묵는 숙소는 언니가 9년 전에 왔던 곳. 산티아고 일정 중에 여기는 반드시 다시 묵어야 한다고 딱 하나 요구했던 곳이 Albergue A Reboleira다. 여기는 순례자들이 다 같이 먹는 커뮤니티 디너가 유명한데 메뉴는 늘 똑같다고 한다. 언니가 먹었던 9년 전과 지금, 매일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아직도 같은 메뉴를 먹고 가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와~ 나 너무 행복했잖아~! 일단 처음 나온 야채 수프가 꼭 시레기국 같았고, 메인은 갈비찜 맛이 났다. 음식부터 일단 한국인은 다 사랑해요 할 수준. 게다가 서로 다 같이 잔을 부딪히고, 격려하며 알아가는 바이브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오늘 일본인 순례자 한 분의 생일이어서 다 같이 불 끄고 초 키고 노래도 부르고, 너무 힐링이 되었다.


너무나 따뜻했던 사람들과 함께해 행복했던 식사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음식으로 위로받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가장 힘들었던 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걸을 정도로 멘탈이 나가있던 날, 사람들 사이에 앉아 맛있고 따뜻한 식사로 위로받았다. 나에게는 영혼을 위한 치킨수프 같은 순간이었다. 내일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걸을 에너지를 사람들과 함께한 식사에서 받았다. 못났던 감정들이 음식을 타고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 특별한 순간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우리 언니와 함께하고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늘 그렇듯 내가 힘들 때 앞에서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끌어주는 언니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낀 하루가 아닐 수 없다.

 "거봐, 내가 여기는 꼭 와봐야 한다고 그랬잖아.“

 언니가 이곳 폰프리아의 A Reboleira에서 나와 공유하고 싶었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더라. 마음이 한가득 따뜻해진 채 마무리할 수 있었던 하루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30일 폰프리아의 Albergue A Reboleira

가격: 개인실, 50유로 (7만 2천 원)

구글평점 4.6,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작은 마을의 가운데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꼭 다시 들릴 거예요

나의 경험 : 개인방 자체는 그냥 보통 산장 같았다. 화장실도 좁고, 모던하진 않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정도. 룸만 따지고 본다면 평점 4 정도를 주겠지만 여긴 음식이 끝내준다. 거의 레전드급 커뮤니티 디너! 이걸 놓치는 사람이 없었으면 싶을 정도로 강력추천한다. 저녁 식사 이외에도 로비에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음식들이 하나같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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