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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Apr 04. 2024

맛있는 문어의 도시 멜리데에서 산 조개 반지

2023년 10월 3일 순례길 29일 차, 곤자르에서 멜리데

2023년 10월 3일 Camino de Santiago Day 29\
Gonzar - Melide : 31.36 km
출발 05:15 / 도착 13:30 , 총 8시간 15분 걸림


회복 탄력성을 배워가는 길

 오늘은 문어로 유명한 도시 멜리데로 들어가는 날. 정말 제일 편하고 즐겁게 걸었다. 8시간 15분을 걸었으면 손에 꼽게 길게 걸은 편인데 언니와 나 둘 다 짧게 느껴질 정도로 피로감 없이 도착했다. 일단 앞 한 3시간 정도의 길은 돌 하나 없는 포장도로라 쉬웠고, 나머지도 예쁘고 고른 숲 길이라 산림욕 하듯이 걸어서 좋았다. 갑자기 안개가 좀 짙다 싶더니 미스트 같이 비가 오기 시작해서 이게 큰 비로 이어지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둘 다 바람막이를 입고 있으니 딱히 불편함 없이 모자 눌러쓰고 잘 걸었다.


 인생은 정말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게 오늘 새벽에 우비를 버리고 왔거든... 앞으로 오늘 포함해 3일밖에 안 남은 순례길 일정의 날씨를 여러 번 확인하고 이제는 비를 안 만나겠다 확신하고 한 달 가까이 가지고 다닌 우비를 딱 버리고 출발했더니 비가 오네... 뭐 그러려니 하고 즐겁게 비를 맞고 왔다. 별거 아닌게 늘 머리로는 알지만 내가 실천을 못했던 '회복 탄력성'을 배워가는 것 같다.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이나 실수를 후회하는데 집중해서 늘 마음이 안 좋았다. 아쉽고, 속상하고 '내가 이때 이러지 않았다면...' 같은 What if 시나리오를 정말 많이 썼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몸이 배운 교훈은 직관적이어서 그런지 바로 머리가 알아듣더라.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고 회복해 나가는 것,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에 집중하니 마음도 편하고 건강해진다. 지금이라도 깨우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결국 대답은 사람이다.
Jubileo 헤아릴 수 없는 벅찬 기쁨


 오늘은 걸어가는 길에 에션셜이라고 하는 구글평점 4.9의 (음식관련해서 평점 4.9를 받기는 거진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카페를 들려 커피를 마셨다. 정말 작은 카페인데 왜 4.9 일지 궁금했고, 커피와 산티아고 케이크를 먹었는데 맛은 있지만 이거 먹으러 다시 온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좋았다. 4.9는 단순한 맛있음을 넘어서 시설도 좋아야 하고 가격도 좋아야 하는데 이곳은 평범함을 떠나 이 장소를 책임지는 사람이 정말 남달랐다. 단순히 좋은 서비스를 준다를 넘어서 정말 사람들이 선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게 아우라가 조용하지만 적극적인 천사의 느낌? 젊은 주인아저씨가 일하시는게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결국에 사람이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진짜 에너지가 다르시다.


Jubileo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에 세요를 찍으려고 보니 도장이 2개다. 하나는 에센셜 카페 이름이 적혀있는 보통의 세요고, 하나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 무늬에 Jubileo라고만 적혀있다. 뜻이 궁금해서 주인아저씨께 물어보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때 느낄 그런 헤아릴 수 없이 몰려오는 커다란 기쁨을 Jubileo라고 해요."

 라고 알려주셨다. 이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찡했다. 오늘 멜리데에 도착하고 나면 이제 이틀 뒤, 내일모레 산티아고에 도착하는데 내가 그 기쁨을 느낄 순간이 코 앞이라 그런지 뭉클하다. 잘 먹었다고 감사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마음이 가볍고 따뜻해진 것 같았다.


점심도 문어, 저녁도 문어
문어 토스트, 삶은 문어, 크로캣, 쌀푸딩 모두 너무 맛있다


 멜리데에 도착했다. 숙소로 도착하기 전에 아예 바로 문어를 파는 뽈페리아로 직행했다. 둘 다 배가 고파서 구글 평점 4.7의 Casa alongos에서 정말 만족한 식사를 했다. 우리 둘 다 해산물보다는 고기파라서 문어도 그냥 있으면 먹지 찾아가서 먹는 타입은 아님을 미리 말하지만 그런 우리 둘이 내일 당장 엄마 아빠 모셔와서 먹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곳이었다. 바로 문어 한 접시를 시키기는 좀 안내켜서 (둘 다 해산물 그리 안 좋아함) 간단하게 문어가 올라간 토스트를 시키고 술을 한잔씩 하다가 문어가 좀 얇은 것 같아 결국에는 가장 많이 먹는 삶은 문어를 시켰다. 그리고는 "와~ 대박이다. 를 외치며 먹게 되었다지. 같이 시킨 화이트 와인도 맛있었고, 언니는 크로켓이 먹고 싶다고 믹스로 된 것을 시켰는데 대구맛, 시금치+치즈 맛, 오징어 먹물 맛 3가지가 다양하게 나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둘 다 여기 음식이 너무 괜찮은 것 같다고 디저트도 맛있을 것 같아 내친김에 후식으로 쌀푸딩과 초콜릿 크림도 시켜 먹었다. 주문받는 아주머니도 밝고 친절하시고 전체적인 바이브가 참 따뜻했다. 아 정말 부모님 멜리데에 모셔오고 싶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씻고 쉬다가 저녁을 뭐 먹을까 고민 끝에 다시 문어를 먹으러 가자는 언니. 우리는 정말 문어를 좋아하지도 않은데 여기 멜리데 문어맛은 진짜 진짜 다르다. 언니가 검색을 하더니 이번에는 갈릭 문어를 먹으러 가자고 A Garnacha를 찾았다. 호객행위로 유명한 곳인데 한국 입맛에 꼭 맞는 갈릭문어는 아마 여기서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언니가 점심에 문어를 먹고 저녁으로 또 문어를 먹는다기에 의구심이 들었는데 한 입 먹고는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와 뭐야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마늘향이 입에 가득 차는데 여기 요리사가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국인 입맛이다. 단지 유명세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사진으로 보기에는 문어도 크고 그럴듯한데 실은 문어 다리가 세로로 아주 잘 저며져 두 쪽 나오는게 실은 다리 하나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빵도 시키겠냐고 물어서 그냥 시켰는데 나중에 계산을 보니 빵을 2인분 또 따로 계산에 넣어둔게 에휴... 한번 오는 손님들 상대로 조금 못났다 싶더라. 빵은 비록 손도 안댔지만 (맛없이 건조한 빵이라) 우린 문어를 맛있게 먹었으니 그 추억값을 치렀다 생각하고 그래도 기분 좋게 나왔다.


갈릭 문어라니! 한국인을 위한 요리 아닌가!


멜리데에서 산 조개반지
가운데 큰 조개 모양의 반지를골랐다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에 꼭 품어두고 이건 반드시 살 거야!' 하고 온 기념품 목록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개모양 반지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보고 나도 순례길 위에서 순례길과 관련된 마음이 가는 반지를 만나면 하나 사서 평생 잘 지니고 다녀야지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지가 그리 흔한 기념품은 아닌지 29일이 지나도록 아마 부르고스에서 한번, 폰프리아 가기 전 어떤 작은 도시에서 한번 본 게 다였고 그나마도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쉽던 차였다. 그런데 오늘 멜리데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반지를 찾은 거! 이것저것 차 보다가 큰 조개 하나 있는게 마음에 든다 하니 언니가 사줬다. 내가 지니고 다니며 매일 볼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기억하는 작은 리마인더가 되어줄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하다. 게다가 문어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런지 멜리데가 마음에 드는 도시가 되었단 말이지. 언니랑 문어 실컷 먹고 기분 좋은 날 산 반지라 좋았던 기억들이 담겨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이제 내일이랑 내일모레만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게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매일의 길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걷고 있다만 큰 그림이라 할까, 엄청난 목적을 달성하고, 내 인생의 큰 계획이 세워지는 그런 깨우침은 아직 없다. 그냥 걸음걸음의 작은 노력들에 대한 성취감, 매 순간 조금 더 깨어있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등 작은 깨우침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줌을 느낀다. 커다랗지는 않지만 내게는 정말 필요한 작은 교훈들이니 그걸로 족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양한 형태의 의미로 각자에게 필요했던 것을 선사해주고 있는 걸거다. 이틀 남았다! 과연 내가 느낄 Jubileo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10월 3일 멜리데의 Pension Praza das Coles

가격: 개인실, 60유로 (8만 8천 원)

구글평점 4.8,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있음

위치 : 시티 가운데, 큰 슈퍼마켓이 걸어서 5분 거리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매우 조용해서 좋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살짝 아쉽지만 거의 새 시설에 아깝고 컴팩트하고 모던함. 큰 불편 없이 깔끔해서 잘 쉬는 정도지 평점 4.8을 받을 정도로 공간이 넓거나 서비스가 좋거나 한 특이점은 못 느꼈다. 침대도 딱 컴팩트한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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