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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Apr 05. 2024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큰 생각은 없습니다만

2023년 10월 4일 산티아고 순례길 30일 차, 멜리데에서 오페드로조

2023년 10월 4일 Camino de Santiago Day 30
Melide -O Pedrouzo : 33.12 km
출발 05:30/ 도착 14:15 , 총 8시간 45분 걸림


안녕하세요, 새로운 사람들
이제는 거의 줄을 지어 걸어간다. 단체옷을 입은 짧은 순례 코스를 하는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는 사리아-산티아고 구간이다.


 오늘 진짜 끝이 없이 영원한 길을 걷는 것처럼 많이 힘들었다. 내가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폰프리아 가는 길과 오늘이 산티아고 순례길 통틀어 힘든 길 공동 2위 등극이다. 1위는 당연히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는 생장이지. 오늘은 도로 위도 많이 걸어갔는데 길들이 정신없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달까? 산도 찔끔 나타났다 언덕과 돌 가득한 내리막이 시작되고, 다시 마을 찔끔 나타났다 도로가 시작되고 정말 복잡했다. 사리아를 기점으로 인파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재미로 또는 맛보기로 걷기 시작한 깨끗하고 가벼운 행색의 관광객들도 제법 눈에 띈다. 유난히 화장실을 많이 가고 싶었던 날이라 곳곳의 카페를 많이 들렸는데 이제는 화장실 좀 이용하려면 4-5명이 내 앞에 줄을 서있다. 그만큼 유입인구가 확 늘었다는 것. 늘 하듯이 "부엔 카미노!"하고 밝게 인사하지만 아직 길이 새로운 듯한 몇분들은 땡큐"라고 대답을 한다. 아마도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에 부엔 카미노로 답해주는게 아직 어색하신 듯 순례길을 막 시작했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콜라카오 팩이랑 스팀 우유, 나는 코르타도


 오늘은 이렇게 들린 한 카페에서 정말 맛있는 콜라카오를 마셨다. 코코아로는 미국의 네스퀵이 있듯이 스페인에는 코코아 국민 브랜드인 콜라카오가 있는데 이게 정말 맛있다. 나는 코코아보다는 커피를 마시는데 우리 언니가 좋아하다 보니 덕분에 스페인의 코코아도 종종 마시고 다니며 재밌는 경험을 하고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카페에서 쓰는 우유의 종류나 양, 스팀하는 방식에 따라 정말 크리미하게 해주시는 곳에서부터 맹맹하게 해주시는 곳까지 참 다르다. 추운 겨울의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나에겐 이 따뜻한 콜라카오 한잔이 길 위의 추위를 녹여주고, 더 나아갈 힘을 주는 최고의 병기이자 친구가 될 것 같다. 따뜻하게 데워준 스팀 된 우유에 콜라카오 봉투를 열어 탈탈 털어 넣고 저어주면 되는 코코아. 이 한잔이 아침에 빈 속을 따땃~하게 데워주는데 그 기분이 참 좋다.


 이제는 걷는 길이 약간 회사 야유회, 수학여행 느낌으로 바뀌어서 길 곳곳에 그림이나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보이고, 확실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걸었던 조용한 분위기의 순례길은 아니다. 때로는 혼자일 때도 많았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순례길 구간들이 그리워지게 되는 순간이다. 다들 소풍 온듯한 분위기로 크게 떠드는 사람들로 인해 나의 긴 여정의 마지막이 조금 어수선해지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게 되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던 순례길의 모습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정말 단 며칠 만에 길의 분위기와 소음의 종류가 확 바뀌어서 더 마음을 잘 가다듬고 걸어야하는 순간 같았다.


타들어가는 듯한 발
결국엔 도착하게 되는 매일 매일 다른 종착지. 힘들었어도 잘 도착했다.


 오늘 날씨 자체는 26도 정도로 꽤 좋았는데 해가 내리쬐는 그늘 없는 도로 위에서는 몇 배는 더 뜨겁게 느껴졌다. 오페드로우조에 도착하기 마지막 2시간 정도는 정말 발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언니랑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이끌어 줄 에너지도, 참을성도 없어서 서로 말없이 걷는 와중에도 말이나 행동이 날카로워지지 않게 나름 조심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정말 피곤했지만 낮잠을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 할 정도의 피곤함이었다. 이게 30일 동안의 피로가 쌓인 느낌이 아니라 조금 다른 쪽으로 오늘 정신없던 길과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이 빠진 느낌이랄까. 길 자체도 33km라 꽤나 길었던 것도, 날씨가 더웠던 것도 모든게 더해져 정말 지친 하루였다.


 이렇게 열심히 걸어왔으니 또 맛있는 거 먹어줘야지! 어제 멜리데에서 먹은 문어처럼 특별하고 맛있는 식사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어 좋은 식당을 찾아봤지만 이 근처는 딱히 유명한 음식이나 특출난 식당은 없어 보인다. 다행히 그나마 평점 좋은 멕시칸 레스토랑 A Catrina에서 나쵸와 치킨 부리또를 시켜 시원한 콜라 한잔과 함께했다.


나쵸 양이 정말 푸짐해서 결국 부리또는 반 싸왔다


 음식이 푸짐하고 정말 맛있어서 조금이나마 기분 좋게 한숨 돌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 레스토랑의 세요는 왁스로 씰링 해주는 세요라 내 노트 앞에 노란색 왁스로 순례자 모양의 세요를 받았다. 가족 단위로 운영하는 곳인데 맛도 좋고, 서비스도 좋고 다음에 지나가도 여긴 다시 오고 싶다.


내일이 D day인데 아직 큰 생각은 없습니다

 내일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입성이라... 언니와 정갈한 느낌으로다가 내일 입을 옷들과 무릎보호대 등의 기어들을 깔끔하게 세탁했다. 내일을 위해 깨끗한 옷을 잘 게어놓고, 입성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정말 내일 뭘 느껴야 할지는 모르겠더라. 내일 가서 느껴보면 알게 되겠지. 너무 담담한 내모습이 낯설다. 워낙에 감성 풍부한 성향이라 어머어머 하며 떨리고 설렐 줄 알았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난 생각지도 못하게 담대해진 나를 본다. 내가 너무나 남들에게 부러웠던 무던함이라는 덕목을 조금이나마 배운 길이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발가락 상태를 포함한 전체 몸 컨디션도 좋고, 더 아픈데가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 씩씩하게 마지막 하루를 걸으리라. 오늘은 정말 피곤했다. 어수선했던 하루 일정이었다만 이렇게 디데이 하루 전 날 또 안전하게 일정을 마무리했음에 감사하며 잠을 청한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10월 4일 오페드로우조의 Pension residencial Platas

가격 : 개인실, 70유로 (10만 2천 원)

구글평점 : 4.0, 내 평점 4.0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시티 초입구, 슈퍼마켓 걸어서 7분 정도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니요, 돈을 더 주더라도 더 모던한 곳에서 묵고 싶어요 나의 경험 : 순례길 30일 중 가장 비쌌던 곳이지만 좀 오래된 눅눅한 느낌. 가격대비로 친다면 다시 묵고 싶지는 않다. 개념은 호텔식이지만 화장실도 조 그맣고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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