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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Mar 29. 2024

오후에 마시는 상그리아 한 잔의 행복

2023년 9월 27일 순례길 23일 차, 무리아스에서 폰체바돈

2023년 9월 27일 Camino de Santiago Day 23
Murias de Rechivaldo - Foncebadon : 20.88 km
출발 06:30 / 도착 12:15 , 총 5시간 45분 걸림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언니가 발을 다쳤다.

 오늘은 겨우 21km (이제 20km 정도면 겨우라는 말이 나오다니 너무 웃기다)를 걷는 날이라 4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겠지 하며 마음부터가 가벼웠다. 이렇게 새벽 6시 반 오늘의 일정을 시작할 때는 참 좋았지. 어둑어둑하지만 머물렀던 숙소 바로 앞이 순례길 시작이라 처음으로 여정표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신나게 걸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제 보았던 그 환상적인 일출이 다시 시작되고, 언니와 함께 10여 분간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으며 높은 빌딩 하나 없는 평지에서 넓은 하늘을 쳐다보며 순간을 즐겼다.


이런 뷰를 뒤로하고 걷는게 쉽지가 않아 발이 안 떨어진다


 일출이 너무 예뻐서 길을 걷다가 뒤를 참 많이 돌아보았다. 파스텔 칼라로 시작한 불타는 일출은 나중에 거의 형광색에 가까운 밝은 빛으로 하늘을 가득 채웠고, 멋진 구름들까지 더해 그림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바다같이 넓고 끝도 없는 하늘은 이탈리아에서도 아닌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건가? 뻥 뚫린 하늘을 매일매일 진심을 다해 눈과 마음에 열심히 담으려 하고 있다. 정말 예쁘다. 내가 하늘을 보고 와~ 이건 바다 같다 느꼈던 건 모로코 카사블랑카가 유일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하늘은 모로코처럼 넓지만 더 따뜻하다. 어쩜 하늘도 그 나라마다 특징이 있는지 신기할 나름이다.

 계속 멈춰있을 수는 없으니 다시 출발해 본다. 다시 출발할 무렵 정말 이상하리만치 높고 단단히 땅에 박혀있는 돌에 언니가 발을 세게 걸리며 발목을 접질렸다. 이제 겨우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한지 3일 차다. 순간 걱정되는건 당연하고 왜 내가 그 돌을 미리 못 봐서 언니한테 피하라고 언지를 못해줬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발끝만 보면서 땅에 얼굴을 박고 걸어가지는 않지만 여하튼 모든 걸음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거,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나니 다치고 후회하지 말고, 애초에 이런 일이 안일어나게 주의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이 이후 언니는 하루종일 뒤쳐졌다. 정말 어제와 그저께엔 뒤를 돌아보며 언니를 확인할 일은 없었는데 오늘은 계속 뒤로 처지고, 내가 조금 천천히 걸어야 함은 물론, 중간에 한 번씩 멈춰 서서 언니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정말 발이 많이 아픈지 긴 언덕이 시작되고는 언니가 제발 좀 쉬어가자고 아예 멈춰야 할 때도 있었다. 너무 속상하지만 언니만큼이야 할까. 쉬어는 갈지언정 못 걷겠다 소리 안하고 느려도 끝까지 걷고 있는 언니가 고마울 따름이다.


언니가 사줘서 더 의미 있는 인형
내가 고른 순례자 인형은 이거다


 걸어가는 길에 작은 손뜨개 인형을 파는 작은 가판을 만났다. 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있어서 시간을 내어 다가가는 사람 이외엔 모든 사람들이 그냥 지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기념품의 노예가 아닌가. 이곳에서 귀여운 순례자모양의 뜨개질 인형을 만지작거리니 언니가 사줬다. 참이 4개나 달려있는데 2023년이라고 달린 참이 올해 순례길을 기억하기에 딱 좋은 것 같았다. 언니가 예쁘다고 한 나무로 만들어진 노랑색 조개도 하나씩 사본다. 이제부터 사는 기념품들은 훗날 언니와 함께했던 길을 기억할 수 있는 더 색다른 매개체가 되어줄 것 같아 의미가 남다르다.


상그리아 반리터 때리고 취중보행

 오늘의 목적지인 폰체바돈을 5.4km 앞두고 바로 전마을 Rabanal del Camino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당 충전 겸 화장실도 쓸 겸 음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는데 언니가 벽에 쓰인 메뉴를 보더니

 "야, 저기 상그리아 피처로 판다. 시켜봐봐. 나 먹고싶어."

 처음에는 이제 한 시간 정도만 걸으면 도착인데 뭔 술을 마신다는 건가 하다가도 언니가 마시고 싶다니 같이 시켰다. 둘 다 워낙에 상그리아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냥 오늘은 부상에도 열심히 걸어준 언니가 하고 싶은 거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간간한 또르띠아 하나에 달달한 초콜릿케이크까지 하나 시켜 그렇게 상그리아를 마시기 시작했다.


단짠 메뉴에 상그리아 반피처


 "너무 좋다." 언니가 말했다.

 "내가 30살에 산티아고를 걸었을 때는 이런 사소한 재미를 못 누렸거든. 빨리 도착해야지! 하고 걷는데 바빠서 바에 들려서 쉬었다 가고, 이렇게 상그리아도 마시는걸 못했었는데, 너무 재밌다."

 소소한 차이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언니를 보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다. 나이에 따라 경험하는 산티아고는 분명 다르겠지만 9년 전 2014년 그때의 언니와 나, 지금 2023년의 우리는 많이 달라져 있음이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의 언니와 나의 모습이 좋았다. 언니가 어릴 때 경험했던 산티아고도 소중하지만 난 참 다행히도 인생을 더 살고 마흔을 바라보는 어른이 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어서 참 감사하다. 나의 까미노는 불확실한 미래에 내 쓰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20-30대의 그 걱정과 슬픔, 방황을 어깨에 지고 오지 않았음에 너무 고맙다.


까미노는 나에게 현실 지우개

 현실로 돌아가면 수행해야 하는 많은 롤과 테스크에서 지금의 나는 매우 자유롭다. 그냥 거리만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못한다. 그래서 자잘한 생각 자체들이 알아서 분산되고 환기가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루하루 잘 걷고, 잘 먹고, 잘 자는 것뿐이다. 매일 다른 도시에서 짐을 싸고, 짐을 풀며 적응하는데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 매일 밤이 침대에 누우면 5분 안에 꿈나라 직항 예약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쩌면 최고의 현실도피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이 귀한 길을 어떤 용도로 새기고, 활용할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린 거겠다.


 언니와 대낮의 술파티를 한 다음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둘 다 술이 약한건 아닌데 이 상그리아가 취기가 없진 않다. 날이 더워 그런지 몸도 따땃하니 취기가 더 빨리 오른 것 같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왼쪽 코너에 작은 틴 캔 두 개가 놓여 있는걸 발견했다.



Poems, blessings, prayers + love notes
시와 소망과 기도, 그리고 사랑에 관한 말들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 글귀를 하나 뽑아보니 이런 문구가 나왔다.


If you travel far enough, you'll eventually meet yourself. - Joseph Campbell
충분히 멀리 여행을 하다 보면 결국 너는 너 자신을 만날 것이다. - 조세프 캠벨


 지금 나에게 정말 완벽한 글귀가 아닐까. 나는 아마도 내가 누구인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이곳에 와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매일 스스로를 마주하고 있다. 누군지는 몰라도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글귀를 선택하고, 이렇게 가져갈 수 있게 준비를 해둔 그 사람에게 감사했다. 길 위에서의 이런 작은 이벤트들이 나의 산티아고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그분도 아셨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드디어 폰체바돈에 도착했다
레스토랑 Gaia


 다리 아픈 언니가 정말 열심히 걸어줘서 5시간 45분 만에 폰체바돈에 도착했다. 잘 도착했으니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오늘의 점심은 구글 평점 4.5의 중세시대 컨셉의 La Taberna de Gaia에서 호박수프와 돼지갈비를 먹었다. 모든 스태프들이 중세시대 주막 스타일의 가죽 덧대어진 옷을 입고, 술잔도 고블렛잔에 컨셉에 충실한게 참 재밌는 곳이다. 돼지갈비는 포크립이랑 비슷했는데 소스 없이 구운 고기 본연의 맛인게 참 좋았다.

 재밌는 식사를 하고 나서 한 시간 반 의도치 않은 낮잠을 잤다. 언덕길을 오르느라 힘들었던 거, 언니가 다쳤던 거, 낮술 했던 거 다 합쳐 한번에 피로가 몰려와 나도 모르게 침대에 기대 있다 푹 자버렸다. 낮잠을 정말 너~무 맛있게 잘 자서 기분이 다 좋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언니가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한다. 그래, 오늘은 언니 너 하고 싶은거 다 하자 싶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먹을 곳을 찾아봤다. 우리 숙소와 마주 보고 있는 알베르게의 1층 식당이 밖에 걸어둔 메뉴를 확인하고 들어가 파스타와 돈까스 같은 에스칼로페를 시켜 먹었다. 정말 급식 같은 파스타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제 때 먹어주는것의 중요함을 느낀다. 이게 별거 아니지만 인생에 큰 위안이 된다. 언니는 오늘 유난히 파스타가 많이 당겼었고, 그걸 먹어서 기분 좋다니 그럼 된 거야.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해가 져가는 풍경이 예쁘다. 이렇게 여유 있게 내려다보니 우리가 꾀나 높은 고지에 올라와있음이 한눈에 보인다. 오늘처럼 높은 곳에서 하루를 묵었던 적이 있었나? 산 중턱에서 보내는 하루라니 기분이 묘하다.


우리가 높은 곳에 있긴 한가보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간다. 아침에 언니가 발을 다쳐서 속상했었고, 예상치 못했던 경사 있는 산행으로 정신이 없었고, 상그리아 몇 잔씩 먹고 기분 좋게 마지막 한 시간을 걷고 밥 두 번 먹으니 하루가 끝이다. 참 단순하지만 이런게 좋다. 내일은 더 좋은 하루이길.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7일 폰체바돈의 El Trasgu de Foncebadon

가격: 개인실, 62유로 (8만 9천원)

구글평점 4.5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산 중턱의 작은 마을이라 건물이 몇 개 없다. 다 센터라고 할 듯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로비에 작은 슈퍼와 기념품 샵을 운영해서 간식거리 사기에 편함. 방 침대도 폭신하고 뜨거운 물 잘 나오고 짐을 올려 둘 공간도 마련돼있어서 좋았다. 베갯보와 수건 모두 자수 로고가 프린트된 맞춤인게 여기 주인은 진심으로 이 숙소를 운영하시는구나 싶었다. 방음도 좋고, 밖에 풍경도 좋아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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