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BC 은행이 발간한 ‘Expat Explorer 2016’에 따르면 해외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엑스펫(Expatriate, 주재원을 포함한 잡노마드)’ 가운데 밀레니얼 세대들의 22%가 직업적인 목적에서 외국행을 택했다고 답했다. 이들의 49%는 엑스펫으로서의 직업적 만족도가 모국에서보다 높다고 응답했고 이들의 52%는 외국에서의 직장 문화가 모국에서보다 낫다고 답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1980~1982년)부터 2000년대 초(2000~2004년)까지 출생한 세대를 일컫는다. 미국 세대 전문가인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가 1991년 펴낸 책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Generations:The History of America’s Future)’에서 처음 언급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X세대 다음 세대라고 해서 Y세대로 불리거나 컴퓨터 등 정보기술(IT)에 친숙하다는 이유로 테크 세대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른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궁핍해 결혼과 내 집 마련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특징이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한 명으로서 나도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나의 경우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나의 '외노자(외국인 노동자)' 생활은 더더욱 직업적 목적이 컸다.
내가 하던 일은 아시아 오일, 에너지 원자재 트레이딩 시장의 중심지인 싱가포르에서 원자재 선도시장의 기준 가격을 책정하고 시황 및 산업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시장은 원유인 크루드 오일(Crude Oil)에서 나온 나프타(Naphtha)를 원료로 생산한 다양한 석유화학 제품의 선도 거래 시장이었다.
나의 주요 업무는 매일 관련 시장을 체크하고, 싱가포르 시간으로 오후 4시부터 4시 반까지 열리는 아시아 오일 & 에너지 장외거래(OTC, Over the Counter) 시장에서 비드(Bid)와 오퍼(Offer), 딜(Deal) 가격을 취합해 다양한 석유화학 품목의 벤치마크 가격을 산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매일매일 시장 상황을 담은 시황 보고서를 작성하고, 주별, 분기별, 월별, 연도별로 각 품목별 가격 전망 심층 보고서를 쓰고 각 품목의 벤치마크 가격 산정 방법론을 연구하고 리얼타임 뉴스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또 회사 주최로 열린 석유화학 콘퍼런스에 발표자로 참석해 내가 맡은 시장의 시황과 가격 전망을 전달하고, 아시아 석유화학 콘퍼런스 (APIC, Asia Pacific Petrochemical Industry Conference) 같은 대외 행사에서 발표를 하는 것도 주요 업무에 포함됐다. 참 복잡하지만 다양한 일들을 했다.
트랜스포머형 잡
내가 다니던 회사는 하드웨어적으로는 미디어 회사였지만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증권사, 투자은행(IB), 금융정보제공업체, 컨설팅, 트레이딩 등 다양한 업태를 포함한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하는 일도 25%는 증권사 주식 애널리스트의 원자재 시장 버전에다, 25%는 컨설팅사의 컨설턴트, 25%는 트레이더, 나머지 25%는 언론사 기자 같은 포지션이었다. 아주 독특하고도 혁신적인 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한국엔 없는 일'이다.
한국으로 치면, 주식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트레이더, 기자 등 최소 4가지의 직업을 혼합한 유형의 직업인 셈이다.
싱가포르에는 이런 융합형 직업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산업과 기업도 엄청나게 많았다. 예컨대, 우리 회사와 비슷한 업태만도 오일 & 에너지, 철강, 인수합병(M&A), 곡물 트레이딩 등 5-6개가 넘었고 그 하나하나의 업태에 최소 3-4개의 경쟁사들이 존재했으니, 내가 아는 곳만 해도 20-30곳을 넘는다.
하지만 모조리 한국에는 없는 산업, 기업, 직업들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일자리 가뭄에 허덕이는지 알 만 한 대목이다.
싱가포르가 강점을 보이고 있는 금융·원유 거래·마이스(MICE) 산업은 우리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혁신형 일자리를 만들며 자국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엔 한국만 한 굴뚝산업은 없지만 굴뚝 없는 21세기형 서비스·지식 집약산업을 바탕으로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MICE는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이벤트와 전시(Events & 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 '굴뚝 없는 황금 산업'으로 불리며 새로운 산업군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시적 경제 효과 외에도 성공적인 국제회의 개최를 통해 인프라 구축, 국가 이미지 제고, 정치적 위상 증대, 사회·문화 교류 등의 긍정적 효과가 발생한다."[2]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단순 반복적 일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경우 자국민을 채용하는 공무원 가운데도 외국인이 상당수 있다.
내가 아는 미국 뉴욕 태생의 중국계 미국인 친구 테드(Ted)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고액 연봉을 쫓아 싱가포르 국토 개발청(Singapore Land Authority)에 공무원으로 입사했다. 싱가포르의 적극적인 외국인 기업과 외국인 인재의 유치가 경제성장과 산업 혁신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외국인 경제 활동인구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지만, 교수·연구인력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문 인력 비중은 겨우 5%를 밑도는 상황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정부가 인구구조와 국제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중장기적인 이민정책을 확립해 운용하고 있다. 실제 제조업 중심 산업구조와 보수적인 이민정책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유사점이 많았던 독일은 저출산·고령화와 우수 과학인재 부족 현상에 시달리면서 빗장을 열어젖혔다. 이를 위해 독일은 2012년 8월 외국인 전문인력 유치를 위한 '블루카드 제도'를 도입해 외국인 전문 인력에게 요구되던 자격 요건을 대폭 완화했고, 영주 허가 획득에 필요한 체류기간도 줄여줬다."[3]
매일 밤 퇴근 후 한국 드라마를 보며 향수병에 허우적 대면서도 코리아 노마드의 삶을 접고 선뜻 귀국을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한국에는 없는 일이다.’
한국엔 왜 없을까? 참으로 안타까웠다. 일단 내가 몸담았던 업계만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한국은 허브(Hub) 산업이 드물다. 아니 없다. 허브 하면 생각나는 것 두 가지는 한국의 인천공항이 동북아 물류 허브 공항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과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 일환으로 추진하다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는 동북아시아 오일 허브 전략… 이 정도다. 두 가지 모두 경쟁국인 중국을 비롯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이미 꽤 많이 뒤처져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엔 없는 이 같은 획기적이고 참신한 산업들이 왜 싱가포르에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도 연평균 온도가 27-32도에 달하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무더운 열대기후의 좁아터진 섬에 말이다. 뭐가 좋다고.
고부가가치의 선진형 산업생태계는 싱가포르가 스스로 일군 결과물이 아니다. 그저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을 낮은 법인세를 무기로 수용해 얻은 지렛대 효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마어마 하다. 이 점이 바로 외국 기업이 진출하려 할 때마다 기업사냥, 먹튀, 국부유출의 프레임을 씌워 가로막는 한국과의 차이점이다.
싱가포르는 영국이 19세기 초 동인도회사 지배 하의 해협식민지로 편입한 이래 중계무역항으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1963년 9월 16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원이 된 뒤 2년 뒤 또다시 말레이시아에서 추방당하며 1965년 8월 9일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하지만 당시 국민의 대부분이 무단 정착촌에 거주하는 빈국인 데다 좁은 국토와 천연자원 부족으로 고정 수입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중계무역항도 개발이 지연되면서 물동량 정체에 빠진 상태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지도자, 리콴유가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으면서 싱가포르는 전 세계의 최빈국 중 하나에서 전 세계 부국 중 하나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이 같은 변화를 가능케 한 정책은 바로 '낮은 세금'과 '영어 공용화'였다. 싱가포르는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5-10년간 면제해주는 텍스 홀리데이(Tax Holiday)를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외국인 프렌들리(Friendly) 정책을 편다.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는 60 이상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영어에 능숙하다. 외국인 투자자는 물론 절세를 위해 싱가포르인이 되길 자처하는 전 세계 갑부들에게 싱가포르가 각광을 받는 이유다.
나는 한국이 싱가포르와 동일한 ‘낮은 세금’과 ‘영어 공용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다. 나라별로 주력 산업이 다르고 고유의 언어인 한글을 파괴해 가면서까지 영어를 무리하게 도입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엔 없는 Job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5년여간 ‘한국에는 없는 일’을 하며 살아가면서, 싱가포르에 감사하면서도 문득문득 질투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보다 특출 나게 잘난 나라도 아니고 한국이 내세우는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 소위 말하는 ‘굴뚝산업’도 없다. 4계 절도 없고 후텁지근해 기후적으로도 후지다. 국토는 서울만 해서 놀러 갈 곳도 없이 답답하다.
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3배 이상이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싱가포르에 진출하지 않은 글로벌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싱가포르에선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우리나라 스카이(SKY) 대학 출신도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인 굴지의 글로벌 기업에 다닐 수 있다. 부럽고 샘난다.
이런 차이가 나타난 이유가 과연 뭘까. 그중 하나는 싱가포르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산업 구조 개혁을 거듭하는 사이, 한국은 1950년대 전후 폐허를 딛고 1960-1970년대까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뒤론 산업 구조 개혁이 거의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 구조는 재벌 위주의 과거형 선단식 경영[4] 구조에서 수십 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단식 경영이란 재벌그룹들이 주력업체를 중심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하면서 많은 계열사들을 거느린 행태를 선단(船團)에 빗댄 것이다. 선단식 경영은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70-1980년대 재벌들이 정부의 금융지원을 지렛대 삼아 덩치를 키우면서 심화됐다. [4] 이렇게 몸집을 불린 산업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 산업인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등 소위 말하는 ‘굴뚝산업’이다. 당연히 혁신적인 형태의 21세기형 일자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굴뚝산업을 기반으로 수출로 먹고사는 수출의존형 경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금융과 법률 등 서비스산업을 개방하지 않은 채 우물 안 개구리식 경제구조를 갖게 된 것도 이 같은 변신을 가로막는데 일조했다.
자국의 산업을 지키고자 규제와 폐쇄적 정책으로 빗장을 걸어놓은 결과는 서비스업 노동생산성과 글로벌 혁신 능력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드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싸이월드(페이스북), MP3(애플 아이팟), 태블릿 PC(애플 아이패드), 민박(에어 비앤비) 등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 놓은 상품과 비즈니스 모델은 결국 참신한 아이디어와 마케팅력, 생산 효율화로 무장한 글로벌 기업들에 번번이 시장을 뺏기기 일쑤였고, 금융, 법률 등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경쟁력은 선진국을 크게 밑돌고 있다.
한국이 이렇게 ‘우물 안 세계화’에 빠져 있는 사이, 싱가포르는 과감한 규제 개혁과 세제 인하, 영어 공용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통해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과감히 유치하고 경제자유화를 이룩하면서 한국처럼 노동 및 자본 집약적 굴뚝산업이 아닌 지식과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산업을 크게 키웠다.
다양한 산업이 융합된 ‘트랜스포머형 직업’이 탄생한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는 없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