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영국에서 석사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했던 실수 가운데 가장 우스꽝스러웠던 것은 영국인 할아버지 교수에게 인사를 할 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면서 손까지 흔들어 댔던 것이다.
‘웃어른에게는 고개를 숙여 인사해야 한다’란 한국식 예의범절과 나이불문 친구가 될 수 있는 서양식 관계 맺기가 결합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난 영국 유학시절, 머리가 희끗하고 나이 지긋한 교수를 볼때마다, 심지어 싱가포르에 와서도 나이 많은 상사들을 볼 때마다 종종 손 흔들며 동시에 목례하는 특이한 인사법을 선보였다.
싱가포르에 와서 본격적으로 다국적 기업 생활을 시작한 이후엔 싱가포르 보스인 62세 여자 인디언, 글로벌 보스인 40대 남자 영국인 등 상사들을 볼 때마다 소위 ‘Intimidated(위협을 느끼는)’ 되어 식은땀을 살짝 흘리는 등 외국 시각에선 ‘이상 행동’을 끊지 못해 “넌 왜 나만 보면 쫄고 그러냐”는 농담 섞인 질문을 받곤 했다.
이런 행동은 한국에선 일종의 귀여움 혹은 겸양의 정서로 느껴질 만한 것들이다. 한국에선 윗사람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고 할 말을 서슴없이 하는 아랫사람들을 일컬어 ‘건방지다’ 내지는 ‘무례하다’라는 표현을 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윗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이 같은 심리와 행동이 몸에 밴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돌이켜보면 난 어릴 때부터 ‘당돌하다’란 평가를 자주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한창 사춘기를 겪을 중학교 시절까지. 그 이후엔 ‘나는 당돌하다. (고로) 고쳐야 한다’는 강박에 힘입어 되려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해왔다. 그래서 실제로 성격이 내성적으로 살짝 변하면서, 모든 어른들을 두려워하는 상황에까지 처하고 말았다.
외국에선 그저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할 줄 아는 평범한 아이 중 하나였을 나의 돌직구 발언과 소신 있는 태도가 한국에선 ‘당돌함’으로 폄하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건 바로 ‘꼰대 공화국’. 이 말 한마디로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 꼰대란 어른스럽지 못한 기성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젊은 꼰대의 줄임말인 ‘젊 꼰’이 존재하는 만큼 반드시 나이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모 방송에서 등장했던 ‘꼰대 자가진단 테스트’에 따르면 꼰대는 ‘상대방 나이가 어리면 처음부터 반말한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식으로 후배에게 조언한다’ ‘인사 늦게 하는 후배가 눈에 거슬린다’ 등 10가지 항목에서 다섯 개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꼰대는 대인관계에서 ‘나’를 중심에 두려는 이기주의와 나이·지위·경험에서 오는 ‘우월의식’이 결합한 결과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3월 남녀 직장인 947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회사 안에 꼰대가 있느냐’는 질문에 73.3%가 있다고 답했다. 꼰대 유형으로는 ‘자기만 맞는다고 생각하는 스타일’(30.4%), ‘까라면 까라는 식의 상명하복’(18.3%), ‘자기 경험을 일반화한 섣부른 충고와 지적/(12.4%) 등이 꼽혔다.
아마도 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이 같은 꼰대 문화 때문에 당돌함이란 이미지로 평가됐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어른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이상 증상을 갖게 된 것 같다.
여기에 ‘까라면 까라’는 식의 남성 중심의 군대식 조직으로 유명한 언론사에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이 같은 '꼰대 포비아'는 더욱 강화가 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같은 한국식 꼰대 문화의 시초를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유교문화, 그중에서도 가부장적 문화와 상하관계를 나누는 존댓말 문화, 상명하복식 군대문화에서 찾고 있다.
10년여간 외국 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문화에 적응해가며, 면밀한 관찰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꼰대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서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문화란 점이다. 그것도 일본보단 우리나라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외국에서 근무할 땐 회의나 미팅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직원은 바보 취급을 받거나, 게으른 직원으로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다.
반면, 한국에선 직급이 높은 부장, 이사, 상무, 전무, 대표 등과 회의를 할 때 자기 의견을 너무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나댄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또, 싱가포르나 영국에선 미국인, 영국인, 인도인, 싱가포르인 등 인종을 막론하고 상사나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면 즉각 즉각 답이 왔다.
반면, 한국에선 윗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답변을 듣는 경우가 10번 중 5-6번 꼴로 드물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한국에선 세대 간의 대화와 소통이 쉽지 않다. 싱가포르에서 근무를 할 때 난 언제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불합리한 일과 관련, 건의사항이 떠오르면 서슴없이 이메일을 날렸고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모두들 그런 나를 지극히 정상인이라 평가했다.
나이 어린 후배가 나의 말에 꼬치꼬치 토를 달아도 난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 해야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대로, 내가 나이 많은 상사, 심지어 나의 평가자인 보스에게 반대 의견을 바득바득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저 '당연함'만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이었다면, ‘싹수없는 후배’ 내지는 ‘4차원’ 심하면 ‘똘아이’로 비난받았을 무례한 행동들이다. 코리안 메일 쇼비니스트
한국에서 5년여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모든 상사나 윗분들이 꼰대는 아니었다. 10명을 만나면 최소 3-4명은 탈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나이 많은 분들과의 대화는 어려웠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 팀에 공존했던 외국에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위계서열 보단 ‘우리 모두 친구이자 동료이기에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사실상, 외국에서 일을 하면서 조직 내에서 내가 눈치를 본 사람은 딱 한 사람. 나의 인사고과를 책임지는 매니저 뿐이었다. 그위의 디렉터, 더 위의 글로벌 헤드마저도 나와는 동급이었다. 난 언제나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승진도 했다.
종종 아침을 거른 날. 회사 내 푸드코트에서 싱가포르식 카야 토스트와 수란, 코피(Kopi)를 함께했던 친한 동료 중 한 명은 55세 싱가포리안 아저씨였다. 우리나라였으면 꼰대가 돼 있을 나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정이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상사들의 업무 지시 법이다. 한국에선 “~~ 씨 ~~ 해주세요” 정도만 나와도 양반이다. 꼰대 지수가 높은 분들 중엔 “야이 시끼야”로 시작하면서 “~~ 해”로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물론 나름 애정의 표현인 경우도 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상하관계를 뚜렷이 하며 명령조로 시작하는 이런 화법은 불쾌하다.
외국에선 상사들이 업무 지시를 내릴 때 “해줄 수 있니?” “할 수 있겠니?”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굳이 갑을관계로 따지자면 실무지식을 가진 내가 갑이요, 시키는 상사는 을의 위치였다. 그렇다고 평가자에 대한 존중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티 안나는 갑을관계가 존재하긴 했지만 한국처럼 대놓고는 아니었다.
고베 여자대학 문학부 명예교수인 우치다 다쓰루는 저서 ‘어른 없는 사회’에서 (중략) 다쓰루는 “경쟁 지향적인 교육 시스템이 ‘공동체’보다 ‘개인’만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면서 “사람들이 점점 아이들이 돼 간다”라고 우려한다. ‘꼰대’는 ‘어른 아이’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다쓰루는 “지금의 미성숙한 젊은이들이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미성숙한 노인’이 된다”라고 우려했다
한국의 고질적 꼰대 문화는 걱정 스럽게도 이미 왠만한 외국인들에게도 소문이 나 있다. 그들은 한국의 꼰대 아저씨들을 "Korean male Chauvinist"라고 부른다. 심지어 한국의 조직문화까지도 악명 높아서, 자기들은 도저히 한국 가서는 일 못하겠단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꼰대 문화’의 청산이라고 생각한다. 세대 간의 소통을 단절하고 새롭고 참신한 파괴적 혁신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비뚤어진 위계서열 문화를 기반으로 한 꼰대 문화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조차 이런 심각한 꼰대 문화가 없는 걸 감안했을 때, 한국이 여전히 아랫사람을 찍어 누르는 꼰대 공화국으로 남아 있는 한 한국엔 발전이 없다.
“당신은 꼰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