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말. 싱가포르 중서부 지역 부킷 티마(Bukit Timah) 인근.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도로엔 이상하게도 차가 없고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도 않은 채 비를 쫄딱 맞으며 삼삼오오 분주하게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난 이날 친구와의 늦은 점심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 통제와 사람들의 행렬로 교통이 마비돼 친구와의 약속에 결국 1시간이나 늦고 말았다.
마치 한국에서 열렸던 2002년 월드컵 당시 응원 행렬을 연상케 했던 이 무리의 정체는 바로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의 운구 행렬을 지켜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려는 싱가포르 국민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1년 12월 29일 처음 싱가포르란 나라에 도착해 8년여간을 살며 이날까지 이토록 싱가포르가 부산스러운 걸 본 적이 없다. 인디언이 많이 사는 리틀 인디아(Little India)에서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버스 유리창을 부수고 차량을 불태워 1명이 죽는 등 44년 만의 폭동이 일어났던 2013년에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손에는 작은 꽃과 싱가포르 국기를 들고 비가 내리는 이 궂은 날씨에도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리콴유, 리콴유!"를 외치며 조만간 별이 될 싱가포르 국부(國父)의 마지막 곁을 지켰다. 이 광경은 싱가포리안이 아닌 외국인의 눈시울마저 붉히게 할 만큼 가슴 뭉클했다.
이날 리콴유 전 총리는 싱가포르 국립대학(NUS·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문화센터에서 국가 장례식을 마치고 시티홀, 파당 공원 등 시내 곳곳을 돈 뒤 북쪽으로 13km 떨어진 만다이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영면에 들어갔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할 무렵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고작 500달러에 불과했던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를 31년간 통치하면서 반세기 만에 1인당 GDP 5만 달러 이상, 아시아 1위, 세계 8위의 부자 나라로 키운 '아버지' 리콴유에 대한 싱가포르인들의 존경심은 남달랐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라는 비판 속에서도 리콴유는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대다수의 싱가포르인들의 가슴속에 '존경하는 지도자, 나라의 아버지'로 각인돼 있었다.
실제로 내 주변 싱가포리안 친구들은 리콴유 서거 당시 페이스북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 친구들이 특별히 신민 의식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자발적인 감사와 존경의 표시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리콴유에 대한 싱가포르인들의 자부심과 존경심을 반영한 듯 나의 싱가포리안 친구들은 '민주주의를 역행한 독재자'라는 서방 언론들의 보도를 반박하는 글을 자신의 SNS에 앞다퉈 올리기도 했다.
사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끼리는 종종 '싱가포르는 잘 사는 북한'이라는 흠집 내기 식 농담을 자주 주고받곤 했다. 하지만 분명 이곳은 북한과 달랐다. 싱가포르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이들은 모두 자발적이었기 때문. 내심 부러운 대목이다. 나에겐 한국에서 존경하고 찬양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기기 힘들 것 같단 예감이 든다.
서방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여전히 '세습 독재' 국가다. 리콴유의 2세인 리셴룽 총리가 지난 2004년부터 현재까지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를 기반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이 존재하긴 하나 거의 병풍 수준이다. 지난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또다시 대승을 거둠으로써 1965년부터 단 한 번도 정권교체가 된 적이 없다. 하지만 큰 불만은 없어 보인다. 리콴유에 대한 존경심은 어느새 리셴룽에게로 옮겨 붙은 듯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는가.
2016년 11월 16일 이직과 함께 귀국한 나는 나 스스로 한 결정에 대한 후회와 한국인이라는 자괴감으로 몇 달을 끙끙댔다. "한국은 역시 아니야..."라는 실망감으로 밤마다 관련 뉴스에 경악하며 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 7년여간의 노마드 생활을 접고 고국에 금의환향(?)한 나를 반긴 건 다름 아닌 전 세계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처음 접한 건 내가 새 회사의 오퍼를 수락한다고 헤드헌터에게 통보하고 싱가포르에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바로 직후였다.
싱가포르 언론들은 '무당의 지원을 받은 박근혜 정권 스캔들이 한국을 휘젓고 있다'라며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는 최순실의 이름을 모르는 외국인 친구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싱가포르에서 가깝게 지낸 외국인 친구들은 싱가포리안, 인디언, 미국인, 영국인 등 인종을 가릴 것 없이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터진 거니. 최하고 박이 어쨌니?"라며 문자를 날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덕에 외국인 친구들에게 '쪽팔림'을 당하지 않게 돼 한편으론 다행스러우면서도,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면서 나의 귀국 결정을 가슴을 치며 후회, 또 후회했던 게 사실이다.
박근혜와 리셴룽. 둘 다 산업화의 기적을 일군 독재자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은 2세 지도자다. 하지만 현재 이들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952년생. 나이도 똑같고 대학교 전공까지 전자공학으로 똑같은 이 둘의 행보는 하늘과 땅 차이.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아버지 시절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극복하고, 국민과 소통하고 발로 뛰며 존경받는 지도자로 성장해 가고 있는 리셴룽. 반면, 권력을 사유화하고 직무를 유기한 채 대통령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식 밖의 행동들을 보여 준 '유신 공주' 박근혜.
뿌리는 같되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른 싱가포르와 한국의 독재자 2세 지도자들의 국정 행보는 이들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전혀 다른 평가를 만든 핵심이다.
'(싱가포르가) 참 부럽고, (박근혜라서) 참 부끄러운 2016년'이었다. 돌이켜 보면 싱가포르에 8년여를 살면서 마음에 안 들고 비판하고 싶었던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싱가포르란 나라는 어찌 보면 국가 브랜드 이미지 홍보가 기가 막히게 잘 된 거품이 잔뜩 낀 나라라는 생각이 들 때가 무척이나 많았다. 한국이라면 더 잘했을 텐데...한국도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을 잘 유치할 수 있었을 텐데...란 자신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던 지난 5년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껌을 절대 살 수가 없었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음식물은 물론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었다. 밤 10시 반 이후에는 마트와 편의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도 구입할 수 없었다. 공항을 드나들 때 혹여 누군가가 내 짐에 나 몰래 마약이라도 넣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왜냐면 싱가포르에서 마약 사범은 무조건 사형이다.
혹시라도 나도 모르게 크고 작은 범죄에라도 비자발적으로 엮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왜냐면 싱가포르에선 사소한 절도범에게도 물볼기와 채찍질을 가하는 반인륜적 태형이 존재한다.
외국인을 포함, 550만여 명밖에 안 되는 인구에 비해 너무 큰 규모로 지어진 종합 정신병원을 보며 '왜 이런 게 필요할까. 저곳엔 혹시 반정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적도 많다. 내가 한때 살았던 부앙 콕(Buangkok)이라는 지역에는 내 평생 본 병원 중 가장 큰 정신병원이 있었다.
언론을 통제해서 반정부적인 색채의 기사가 한 줄도 안 나오는 나라. 로이터, 다우존스, AP통신 등 서방 언론사의 기자들이 반정부적인 기사를 한 줄이라도 쓰면 체류증 연장을 안 해주거나 추방까지 해 버리는 나라.
3명 이상이 모여 반정부적인 언행을 하면 영장 없이도 연행이 가능한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보안법 격인 내국 안전법(Internal Security Act)이 현존하는 나라. 나는 이런 꽉 막히고 시대착오적인 싱가포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떠났다.
중국인, 인도인,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다민족 국가의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 싱가포르에 살아보면 말도 안 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종종 한국에 함께 출장 온 싱가포리안 회사 동료들이 시청 앞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비아냥 거리기라도 할라치면, "한국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진정한' 민주 국가라 이런 집회와 발언의 자유가 있어"라며 잘난 척을 해왔던 나인데.
그런 자부심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관두고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단지 쪽팔림을 면할 수 있단 이유에서였다.
똑같이 독재자에 의한 산업화를 이룬 두 나라였지만, 그래도 한국은 민주화 혁명을 통해 제대로 된 시민 민주주의가 꽃피웠다는 자부심으로 늘 싱가포리안들을 마음속으로 눌러 왔던 나였기에 이번 사태의 충격은 매우 컸다.
그리고 이 같은 극명한 엇갈림이 생겨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렇다. 한국은 운이 나빴고, 영국에서 브렉시트(Brexit)가 채택되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됐듯이, 무지한(죄송하지만 당신들의 선택은 무지했다) 다수 시민들의 손에 쥐어진 민주주의란 칼자루에서 역선택(박근혜 당선)에 의한 비극적 칼부림이 탄생했으리라.
하지만 싱가포르에 살며 느낀 건 비록 그들이 아직 제대로 된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독재자 2세의 세습 통치와 사실상 일당 독재나 다름없는 정치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일 지라도, 전근대적인 태형과 껌조차 못 먹게 하는 신민적 통치 논리가 통하는 나라일 지라도.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만국 공통의 화두와 부패 없는 깨끗한 정치를 실천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실과 분명히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싱가포르 도착 직후인 2011년 12월 말. 집을 구하느라 만났던 부동산 에이전트 아주머니가 운전을 해주며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
"We would have remained just as a dot in the map, if we had not have Lee Kuan Yu. (우리에게 리콴유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도상의 작은 점으로 남아있었을 거야.)"
자발적 찬양을 아끼지 않는 또 한 명의 싱가포리안을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