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출장이나 휴가로 한국에 3-4개월에 한번씩 가곤 했는데, 나는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부터 부리나케 '화장'부터 한다. 6시간이상의 장거리 비행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푸석해진 얼굴에 비비쿠션을, 메마른 입술에는 촉촉한 분홍빛 립스틱을 전투적으로 찍어 바른다.
만약 그래도 '복구'가 안되는 날이면, 선글라스든, 뿔테안경이든, 모자든 가릴 것을 최대한 찾아 '위장술'에 나선다.
참 이상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옷에 커피 자국이 묻었든, 얼굴에 뾰루지가 났든, 머리가 한쪽으로 삐져 나왔든, 전혀 신경 안쓰던 나였다. 한국에만 오면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예쁜 구두로라도 빙의된 양 노심초사 외모가꾸기에 혈안이다.
지난 2001년부터 코리아 노마드로 살아오며 휴가와 출장으로 대략 40여개국을 다녔다. 그때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는데. 전세계 어딜 가봐도 한국처럼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치장하고 가꾸는 데 목숨을 거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아날로그 빅데이터' 분석 결과, 나는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성 평등이 보장된 나라일 수록 여자들은 꾸미지 않는다. 반대로 성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 수록 여자들은 외모 가꾸기에 집착을 한다. 풀어 말하면, 남성 우월주의적, 마초적인 나라일 수록 여자들이 외모를 가꾸고, 양성 평등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일 수록 여자들이 '생긴대로' 산다.
난 지난 2005년 인턴십으로 스위스란 나라에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다. 여자들이 죄다 방금 알프스 등산을 하고 내려온 듯 촌스러운 등산복에 운동화를 신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코트라 무역관에 매일 출근을 해야 했는데, 당시 언론고시 3수 취준생의 신분으로, 직딩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나는 매일 마다 정장 치마에 뾰족 구두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거리를 나섰다. 나는 당시 한국과 정반대의 시선의 공포를 그곳에서 느꼈다. 나처럼 '최선을 다해' 꾸미고 다니는 여자는 길거리에 보이는 열명 중 한명 나올까말까 였기 때문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2001년 내가 워킹홀리데이로 미국에 갔을 때, 나는 서부의 왠만한 도시들은 모조리 여행을 했었는데, 그 수 많은 도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날씬하고 화장한 여자를 본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유명한 부촌, 비벌리힐스가 전부였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 꽤나 유명했던 텔레토비라는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인형 캐릭터들을 정원에 꾸며 놓고 생일 파티를 하는 대저택 앞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미드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만 같은 마루인형을 닮은 이십대 여자들이 단체로 우리쪽으로 걸어 오는 것이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선 거의 대부분 '비만, 노메이크업, 후줄근한 목 늘어진 티셔츠에 청바지'. 이런 이미지의 여자들을 본 게 대부분이었다.
2010년. 내가 석사 유학을 갔었던 영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솔직히 영국은 남녀 '역차별'이 있는 나라인 줄 알았다. 은행, 공공기관, 병원, 상점 등 왠만한 내근 직원들 중에 '아줌마'와 '할머니'가 왜이렇게 많은걸까. 물론, 런던 같은 대도시의 은행가, 공공기관 이런 곳에는 양복을 쫙 빼 입은 남성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내 평생 가 본 나라 가운데 이렇게 아줌마, 할머니들이 경제인구로 많이 보이는 나라는 영국이 단연 으뜸이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과연 이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당연히 이들이 꾸미는 데 혈안이 되었을 리는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는 어떨까. 사실, 개인적으로 난 전 지구 상에서 싱가포르 여자들이 가장 기가 세고 드세다고 생각한다.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싱가포르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경제 활동을 한다. 결혼을 한 뒤에도 거의 대부분 직장을 그만 두지 않는다. 결혼한 커플의 대부분은 생활비를 반반씩 부담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싱가포르 여자들은 가정 내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당당하고, 절대 지지 않는 캐릭터들이 많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여성들도 우리처럼 목숨 걸고 꾸며대지 않는다. 화장을 하는 여자들을 보려면 래플스 플레이스 (Raffle's Place) 정도 되는 금융, 비즈니스 중심가로 나와야 한다. 왠만한 여자들은 더운 날씨 탓인지, 선크림에 파우더 정도만 살짝 바르고 다닌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본 나라들 가운데 순서를 매겨 보자면, 여자들이 꾸미는 나라는 한국, 일본, 중국, 동유럽, 러시아, 호주 정도가 떠오른다. 반면, 여자들이 꾸미지 않는 나라들은 미국, 영국, 스위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이 떠오른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향된 근거없는 결론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하지만, 그 나라의 성 평등 정도, 남성중심적인 문화 정도와 견주어 봤을 때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0년 세계 성 격차지수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20)에 따르면 한국은 153개국 가운데 108위를 했다. 우리나라 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르완다(9위), 나미비아(12위), 필리핀(16위), 라오스(43위), 방글라데시(50위)보다도 한참 낮은 순위다.
[출처: 중앙일보] "한국 성평등, 르완다보다 못한 108위"···다른 쪽선 10위 왜
나는 내가 왜 한국에만 가면 예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느꼈던 것은 한국만큼 여자가 예쁜 것이 권력이 되는 사회가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예쁘고 멋진 여성이나 남성을 좋아하는 건 인류의 한결같은 본성이라는 것을 차치하고서 라도 한국에서 예쁘다는 것은 그만큼의 프리미엄이 높다.
그래서일까. 한국에 가면 여성의 몸 구석구석, 하나하나 성형이 불가능 한 곳이 없다. 종아리 축소술, 팔뚝살 제거술, 심지어 웃을 때 잇몸이 흉하게 보이지 않게 한다는 잇몸수술까지...별의 별 수술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나는 한국 여자들이 이렇게 예뻐지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 데에는 여성 스스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왜곡된 자의식이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뜻은 남성 중심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스스로가 남성의 시선에서 자기 몸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성적으로 매력적인 '상품화된' 자신의 모습을 추구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런걸까. 외국인 친구들한테 항상 듣는 얘기가 있다. "한국 여자들은 왜 다 똑같이 생겼어?" 나는 그 얘길 들을 때마다 "응, 아마 한국인은 DNA적으로 동질성이 강해서 그런걸꺼야."라며 얼버무리면서도 내심 참 씁쓸하다.
내가 외국에 나와 떠돌고 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아마 이런 부분도 포함돼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나는 자동적으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그 어떤 '시선의 공포'와 '왜곡된 자의식'을 느낀다. 내가 심리학자가 아닌지라 이게 대체 뭔지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한 마디로 내 얼굴이 어떻든, 내 몸매가 어떻든 외국에선 편하고 자유롭지만, 한국에선 내 얼굴과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진열장의 상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 불거진 '박사방', 'n번방' 사태를 보면서 26만명이나 가입했다는 이 믿기 어려운 여성 혐오, 여성 성 착취물이란 '괴물'이 나오게 된 토양에는 과연 뭐가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 괴물의 기저에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깔려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 중 하나는 한국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예뻐지기 위해 자신을 가꾸는 건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설 때마다 스스로 묻게 된다. 내 눈에 예쁜 나를 추구하는 지, 누군가에게 대상화된 상품성 있는 '예쁨'을 추구하고 있는지 말이다.
"누구를 위해 화장을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