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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생미셸 Nov 02. 2020

제20화 내가 국뽕이 되어가는 이유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난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 지난 2월 사이비 종교단체, 신천지 발 집단 감염 사태로 전세계 언론에 오르 내릴 때까지만 해도 난 "그럼 그렇지..."라며 2016년 '박근혜 사태' 이후로 또다시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반전의 드라마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체 개발한 진단 키트로 하루 수만명 씩 대량 검사를 해대며 엄청난 확진자 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투명성과 개방성을 추구했던 한국은 끝내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고 방역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전 세계 국가들이 불과 몇 시간이면 결과를 알 수 있는 한국산 진단 키트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거나, 방역 선진국으로 거듭난 한국을 배우려고 각국 정책 입안자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다는 뉴스는 이제 더이상 새롭지도 않다.


영국의 BBC, 미국의 CNN 방송에 등장해 유창하고 세련된 영어로 한국의 코로나 방역 노하우를 전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모습은 한국이 이제 내가 알고 있던 '그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 지난 10년이란 세월동안 한국은 참 많이 변했고 발전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이란 시간동안, 한국이 싫어 글로벌 떠돌이가 되었던 나는 서서히 '국뽕'이 되어가고 있다.


외국에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더니, 나 역시 애국자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을 더 애정하는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또 개인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가설이 있다.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미국이나 유럽 등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우리보다 훨씬 발달된 나라에서 10년, 20년, 심지어 평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더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 꼰대'들을 종종 보게 된다.


상식적으로 외국물을 먹었으면, 그만큼 계몽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들은 마약, 성, 자유분방함 등과 같은 특정 카테고리에서는 누구보다 진보적인 반면에, 여성의 성역할, 가정생활 등 특정 부문에서는 의외로 엄청난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선비가 대마초를 피우는' 모습이랄까. 그런 엊박자가 나오게 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결과 나는 아주 주관적인 분석 결과를 내놓게 됐다. 외국에 나와 사는 한국인들은 어쩌면 자기들이 떠나온 시절의 한국적 정서에 머물러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런 것 같다. 나는 2010년 한국을 떠났다. 내가 한국의 수준을 2010년에 고정시켜 비판하고 비교하는 사이, 한국은 이미 어느 정도 수준의 진보를 이루어 낸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 한국의 성공 스토리에 내가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도는 등 '국뽕'이 되어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난 한국을 과소평가 해왔다. 하지만, 지난 10여년을 줄곧 외국을 떠돌면서 난 한국의 우수성을 꽤 자주 체감하게 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에서 난 한국이 전세계 어느 나라 보다 우월하고 우수하다고 자부한다.


첫째는 의료 시스템이다. 지난 2001년 내가 미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을 때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같은 호텔에서 버써 (Busser, 레스토랑에서 음료 등을 서빙하는 알바생)로 함께 일했던 제이슨네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이슨 어머니는 당시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매일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국에서는 엑스레이 하나를 찍는 데 무려 100만원이나 든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평생 병원 문턱을 넘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들었다. 그 얘길 듣고 설사 감기라도 걸려 병원을 가게 될까봐 미국에 사는 내내 건강관리에 노심초사했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은 '오바마 케어'가 등장할 때 까지 의료를 100% 민간의 손에 넘겨 돈벌이 수단으로 만드는 정책을 펴왔다. 현재 수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조차 못 받고 사망하는 대재앙에 처하게 된 이유를 난 거기서 발견한다.


반대로, 의료비가 저렴한 나라들은 어떨까. 2010년 영국에서 석사 유학을 했던 난 자주 독감에 걸렸었다. 특히, 해가 오전 10시에 떠서 오후 3시에 지는 암흑기인 겨울에는 감기인지 독감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침과 미열로 몇 달을 고생했었다. 다행히 영국은 의료가 100% 공공의 영역이라 유학생 신분이라도 공짜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자주 병원 문을 두드렸는데, 문제는 의사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예약을 하면 아무리 빨라야 2주 후, 더 심하면 몇달 후에나 의사를 만날 수가 있었다. 


당시 영국인 친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영국에선 암에 걸리면 치료는 공짜야. 근데, 하도 줄이 길어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죽게되지. 허허허." 사실이었다. 뿐만아니라, 의사를 본다 해도 의료 서비스의 품질도 문제였다. 난 당시 한달을 기다려서 꽤 크고 유명한 종합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나는 이상한 증세에 시달렸었다. 안절부절 못해서 침대 위에 누워 있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자꾸만 밖으로 뛰쳐나가 뭔가에 부딪히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부작용이었다. 난 당시 그게 의사가 준 '타미플루'의 부작용인 줄도 모르고, 귀신에 씌인건 아닐까 겁에 질려 매일 밤 기도를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된 약을 처방받고 정체불명의 기침과 미열은 사라졌다. 그리고 의사는 '타미플루'의 부작용 중에 그런 증세가 있다며 함부로 그 약을 처방해선 안되는 것이라는 설명도 해줬다. 


내가 만약, 그 이상 증세를 좀더 오래 겪었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싱가포르는 어떨까. 싱가포르는 대내외적으로 의료 선진국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아랍 왕자, 전세계 갑부 등 유명인들이 싱가포르에 와서 대수술을 받거나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보다 많은 2만명 이상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100명을 넘지 않는 걸 봐도 의료 선진국이 맞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비용이다. 나는 한번 싱가포르에서 이직을 하는 기간동안 회사에서 주는 의료보험 카드가 없었던 적이 있다. 그때 감기로 딱 한번 의사를 본 뒤 내가 낸 돈은 200 싱가포르 달러다. 우리 돈으로 치면 약 17만원 수준이다. 


한국의 의료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 내 놔도 1등이다. 가성비 갑. 비교적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에 우수한 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전국민이 받을 수 있는 나라는 전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는 절대 바뀌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나는 한국의 공공 복지가 전 세계 내로라 하는 선진국에 비교해 볼 때 꽤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수준은 모르겠다. 다만, 체감하는 공공시설의 퀄리티는 한국만큼 잘 되어 있는 나라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한국엔 '공짜'가 많다. 


난 2010년 영국 유학을 시작하기 전에 한달 반 동안 자동차를 렌트해 프랑스에서 캠핑 여행을 했었다. 그때 나는 친구와 함께 매일 캠핑장을 찾아 헤매고 전기와 물을 확보해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생존을 위한 음식과 잘 곳을 확보하는 것은 이 로드트립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톨레랑스'와 관용의 나라. 프랑스 혁명으로 중세 봉건 시대를 끝내고 시민에 의한 자유 민주주의 혁명을 처음으로 이뤄낸 나라, 프랑스에는 '공짜'가 없었다. 한 마디로 과장해서 말하면 '돈을 내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 밥을 해 먹을 전기와 물은 철저히 '돈을 낸 자'만 얻을 수 있었다. 화장실이나 공공 시설의 전기 콘센트 구멍엔 심지어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화장실 마다 1유로를 내야 입장이 가능했다. 그때마다 난 한국의 넉넉한 인심을 떠올렸다. 혹자는 그게 혈세가 새어나가는 구멍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한국의 '체감 복지'가 얼마나 넉넉한 나라인지를 몸소 느꼈다.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동유럽도 공공시설의 인심이 야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작년 엄마 칠순을 기념해 열흘간 엄마를 모시고 동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행 침대열차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근데 그날따라 기차는 2시간이나 연착이 되었다. 안내 방송 조차 없었다. 그때 엄마는 화장실이 무지 급한 상황이었는데, "곧 기차가 도착하면 화장실에 가면 돼"라고 하시며 참으신 게 벌써 2시간 째를 향했다. 참다 못한 엄마와 나는 플랫폼에서 다시 기차역 대합실 쪽으로 부리나케 달리며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이렇게 큰 국제 기차역에 왜 화장실은 안 보이는 건지...대체 이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용무를 해결하는 건지 화가 나던 찰나에 한 화장실을 구세주처럼 발견했다. 근데, 화장실에는 왠 지하철 개찰구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돈을 받는 사람이 입구를 떡 하니 지키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엄마는 개찰구를 빛의 속도로 '점프'해서 무단으로 화장실에 입장하셨다. 그때 고래와 같은 고함을 지르던 직원에게 나는 치사함을 꾹 참고 '1유로'를 건냈다. 공공 서비스가 국가의 재산인 공산주의의 역사가 오랜 이곳 체코라는 나라의 수준이 이 정도다.


난 역사학자도 아니고 비교문화연구자도 아니기에 자세한 각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몸소 느낀 '체감 복지' 수준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한국을 빼고 내가 가본 왠만한 나라들은 모두 '돈을 내지 않으면 피도 눈물도 없다'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한국 만큼 공공시설의 인심이 후덕한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난 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은 매우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은 지난 10여년 간 많은 발전과 진보를 거두었다고 믿는다. 내가 점점 더 '국뽕'이 되어가는 이유다. 


하지만, 난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한국에 돌아가기가 무섭다. 한국이 이만큼의 발전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뒤떨어진 부분이 아직도 넘쳐 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조직문화, 성 소수자, 장애인, 여성에 대한 차별, 여전히 가부장적인 가정 문화, 다양성이 결여된 정서적 허약함 등등...여전히 내가 비판할 부분은 수두룩하다.


알다시피, 내가 쓰고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은 한국을 비판하는 글들이다. 하지만, 그 비판의 기저에는 애증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애증의 바탕에는 들끓는 애정이 있다. 나는 내가 완벽한 '국뽕'이 되어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서는 못 배길 날이 올 때까지 글을 쓸 것이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비교할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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