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개월 간 싱가포르에 내려진 서킷 브레이커 조치로 나는 친구도 못 만나고, 식당에 앉아서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갇혀서 일만 하는 '재택 지옥 감옥살이' 뿐이었다. 정부가 금지한 이 모든 것을 어겼다간, 벌금이 무려 최대 1만 싱가포르 달러, 한화로는 약 860만 원에 달해 몰래 친구를 만날 생각조차 못했다. 외국인 노동자는 어길 즉시, 거의 대부분 바로 추방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1달 간만 서킷 브레이커를 가동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이주 노동자들의 기숙사에서 하루 1000명 이상의 코로나바이러스 집단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연장, 또 연장. 결국 3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코로나로 친구도 못 만나고, 레스토랑에도 갈 수 없고, 쇼핑몰에도 갈 수 없는 '고담시티' (Gotham City: 영화 베트맨에 나오는 우울한 도시) 생활을 졸지에 하게 되면서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1. 반려식물을 기르게 되었다. 유일한 나들이 코스로 매주 슈퍼마켓을 갈 때마다 예전엔 파는지조차 몰랐던 식물들이 눈에 들어와 한 개 두 개 사기 시작한 게 벌써 미니 정원을 이뤘다.
칼랑코에라는 이 식물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라는 선인장과의 꽃인데, 아기자기한 꽃 모양이 너무 귀엽고 예쁜 게 아닌가. 그렇게 노랑이와 분홍이 두 그루를 입양했다. 티브이 '나 혼자 산다'를 보다가 박세리가 파인애플을 통째로 먹고 남은 뿌리 쪽을 심으면, 미니 파인애플 나무가 자란다기에 나도 그렇게 파인애플 두 그루도 심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친구는 내가 서킷 브레이커 중에 '개고생'을 하며 이사 온 지금 집(이전 글, 두 번째 고소장을 접수했다 참조), 옆집에 사는 이란계 엑스펫 친구가 웰컴 화분으로 사준 이름 모를 식물인데, 엄청 잘 자란다. 곧 나무가 될 기세다.
이렇게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꽃과 식물 친구들을 여러 '마리' 입양해서 물도 주고 시든 입사 귀도 따주고 얘기도 나누고, 사랑을 주면서 지난 3개월을 심심하지 않게 보냈다.
#2. 기타를 배웠다. 예전에도 싱가포르 삶이 무료한 나머지 바이올린을 사서 친구들과 모여 배운 적이 있었는데, 결국엔 '반짝반짝 작은 별' 정도 몇 번 켜다가 싫증을 내곤 바이올린을 팔아 버렸다. 기타도 친구들과 모여서 배우면 좋았겠지만, 서킷 브레이커 발동으로 동거인 이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난 유튜브로 기타를 독학했다. 알고 보니 손가락 여러 개로 코드만 집어 내려치는 '스트로크'라고 하는 연주법으론 단 하루 이틀 만에도 기타를 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이틀 만에 '연가'를 독학해 쓸쓸할 때나 열 받았을 때 혼자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곤 했다.
#3. 난 달리기를 좋아하게 됐다. 과거 폐렴을 두 번 앓은 데다, 유산소 운동을 거의 안 하는 사람인지라 폐활량이 거의 70대 할머니 수준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던 나였다. 그만큼 달리기는 나와는 거리가 매우 먼 운동이었다. 서킷 브레이커 기간 중 이사를 온 뒤부터는 집 앞에 있는 마리나 베이 공원에 매일 마다 나가 달리는 게 나의 일과가 되었다. 뛰면 뛸수록, 숨도 덜 차고, 얼굴에 붙었던 후덕 살도 사라지고, 뱃살도 살짝 빠진 것 같다. 그리고, 후텁지근해서 칠색 팔색을 했던 싱가포르의 야외 활동에도 정을 붙였다. 상쾌하고 청량감은 없지만, 따뜻하면서 촉촉한 자연을 마주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매일 업무를 마치고 마스크를 쓰고 달려 나간 마리나 베이는 나의 힐링 장소가 됐다. 덕분에, 쌍둥이 무지개도 목격하고, 바닷가에 앉아서 노래도 듣고, 마지막으로 본 지 십 년도 넘은 '노을'이란 것도 봤다. 나름 감성적인 혼자만의 여유와 호사를 누렸다.
#4. 피부가 좋아졌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매일 밖에 나갈 때마다 했던 화장을 지난 4개월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한 달에 1번 할까 말까. 거의 안 하게 되자 피부가 숨을 쉬고 혈색이 맑아진 것이다. 그동안, 각종 좋다는 화장품을 바르고 피부과도 다니며 공을 들여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화장을 안 하니 이렇게 스스로 알아서 회복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이제는 쌩얼이나 화장한 피부나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 또다시 화장을 하게 되겠지만, 당분간은 아주 가볍게 하고 다녀도 될 것 같다.
#5. 엄마와 전화하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물론 서킷 브레이커 전에도 난 엄마와 매일 카톡을 주고받는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매일 비디오 콜을 하게 되면서 '엄마~엄마~엄마~'를 하루에 몇 번을 부르는지 모른다. 엄마는 핸드폰 화면 건너 처량하게 엄마를 부르는 나를 보며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송아지 같다"라고 했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군가와 매일 소통하며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긴 했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에 갈 순 없어도 오히려 엄마, 가족들과 그렇게 더욱 가까워졌다.
#6. 마지막으로, 다시 한글로 글을 쓰게 됐다. 10년 전 한국을 뜬 이후로 난 거의 절독과 절필을 했다. 한국에서 잠시 기자로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 주문된 글, 혹은 참견당한 글들만 공장 노동자처럼 써대느라 글쓰기에 질려 버렸다. 쏟아지는 정보와 뉴스의 홍수 속에 체할 정도로 피로했고, '모르는 게 약'이란 말 뜻을 알게됐다. 유학길에 오른 이후엔 한국 뉴스나 한국어로 된 책도 되도록이면 쳐다보지 않았다. 지난 10년간은 거의 영어로 된 학업 또는 업무용 글만 썼던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강제 감옥살이 기간 동안, 난 다시 한글로 된 글을 쓰고, 한글로 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0년 전 한국을 떠나오던 때의 설레고 벅찼던 나를 다시 되찾았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대책없이 올랐던 유학길에 꿈꿨던 삶 속에 바로 지금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금 내가 힘들다고 불평불만하는 오늘은 지난 2010년 내가 소망하고 꿈꿨던 미래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는 매일 조깅을 하는 마리나 베이 공원벤치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항상 앉지 말라고 테이프로 덕지덕지 막아놨던 공원 벤치가 봉인해제 된 것이다. 여기 앉아서 마리나 베이를 바라보는 기분이란. 전에 한번은 뛰다가 숨차서 벤치는 고사하고, 땅바닥에 앉아 쉬는데도 단속요원이 와서 일어나라며 뭐라고 했었는데. 이젠 눈치 안보고 당당히 벤치에 앉아 쉴 수가 있다. 이게 뭐라고. 왜 이리 감격스러운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모임을 한 게 3월 31일이었으니, 거의 지난 3개월을 꼬박 혼자 지냈다. 그동안 혼자 이사도 하고, 일 폭탄도 맞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생존본능으로 나는 끊임없이 행복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평소 너무나 당연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감사해 본 적조차 없는 작은 것들에 열광하고 감격할 정도로 행복이란 것에 겸손해졌다. 그동안 타국에서 가족을 대신해 외롭지 않게 내 곁을 지켜줬던 친구들의 소중함도 절실히 느꼈다.
이제 내일 드디어. 나는 3개월 만에 모든 것이 마비된 고담시티가 아닌 진짜 '세상'으로 돌아간다. 쇼핑몰 문이 열리고, 옷가게에서 구경을 할 수 있고,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고, 친구들과 만나 맥주 한잔 들이켤 수 있는 자유의 세상이 돌아왔다.
그 당연했던 일상이 이토록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그토록 하찮고 당연하고 시시한 자유가 이토록 열렬한 행복의 원천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의 이 기분을 절대로 잊지 말자.
나중에 훗날 또다시 모든 것이 당연해지고 하찮아 지고 시시해졌을 때, 오늘 쓴 이 글을 꺼내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