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다운 리듬을 지키고 있을 때, 선물같이 누리던 날들.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멕시코 워크캠프를 다녀온 후
굳이 곧바로 새로운 워크캠프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체력적으로 힘이 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20대 친구들과 함께
그날의 워크캠프 공식 일정을 소화한 후,
밤이면 술 먹고 뒤풀이 하던 생활을 2주 이상 해왔더니
돌아와서 한의원 치료만 한 달을 다닐 정도로 몸이 축났다.
(생각해 보니,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도
농활 다녀와서 한 달을 병원 다닌 적이 있다.
꼭 나이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몸이 머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이런 활동들에 예민하게 탈이 잘 나는 편인 듯.)
그럼에도 괜스레 워크캠프 공식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캄보디아 워크캠프에서 아이들 영어 가르쳐주는 프로젝트를 발견했고
이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워크캠프 프로젝트는 지구 전역에서 거의 1년 내내 열리지만,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참가 자격에 제한을 두기 때문에
이렇게 맞춤형 프로젝트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영어가 안 통하는 곳이었다.
한국 사람들, 영어 콤플렉스 가지고
스스로 영어 못한다고 생각해도
동네 김밥 분식집만 가도 어지간한 메뉴는 영어로 설명이 통한다.
그래서 워크 캠프 내부라든지,
영어를 잘하는 아주 특별한 경우의 멕시코인을 만났을 때만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고,
그래서 스페인어 공부를 더 해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 순간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캄보디아 워크캠프는
무려 영어 가르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니,
이번에야말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프로젝트는 캄보디아 씨엠립 근처 농촌에서 진행되었고,
참가자들이 내는 돈을 모아서,
돈이 모이는 대로 조금씩 학교를 짓고 있었다.
내가 참여할 때만 해도 흙바닥에 책상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지붕과 옆벽의 뼈대는 있는데 아직 벽은 없었던 구조였다.
그래서 좋았다.
수업을 하다가 water란 말을 하면,
그대로 흙바닥 옆 도랑물을 가리키면서 뛰어들 수도 있는 공간이어서.
너희의 말, 너희의 리듬을 존중하고 싶었어.
첫날은 아이들도,
참가자들인 우리도 모두 어색했다.
우리가 어색하면 안 되는데...
우리 팀원들이 어쩌다 보니 나만 빼고 다 남자들이었는데,
공대 대학원생들, 공대 출신 회사원 (유럽 출신이라 여름휴가를 3주 정도 뺄 수 있었다.),
그리고 물리학과 대학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유영혼 여행가가 한 명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 이과 출신이었고,
프로젝트에 임하면서
본인들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를 ‘가르치기’까지 해야 해서 얼어 있었다.
어색한 첫날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사는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가는 길 내내 나는 통역을 도와주던 현지 프로젝트 멤버에게
“저건 크마이어(캄보디아어)로 뭐라고 하냐?”
를 물었고,
그 친구가 대답해 주면 따라서 발음해 보았다.
나보다 몇 발 앞서서 걷고 있던 아이들은,
내 발음이 엉성한 게 재미있기도 하고,
자기네 말은 소위 ‘나와바리’니까...
나한테 훈수질을 시작했다.
‘그건 그렇게 발음하면 안 된다..’
‘이거다..’
‘아니다. 그건 조금 다르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다...’
내가 몇 개 호응하기 시작하자,
하나, 둘 만 물었는데, 무려 다섯, 여섯, 일곱 개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흠... 어른이 되어도 공부하기 싫긴 마찬가지란다, 얘들아.
두 개만 알고 싶지 나도 한 번에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를 알고 싶진 않다고~
그 순간을 시작으로 이 친구들과 마음을 텄다.
수업은 내가 영어 문장을 하나 가르치면,
동등하게 크마이어 문장 하나를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우리로 따지면 영어- 한국어 해석 버전이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영어 only로 가르쳐야 더 효과가 높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영어 공부, 프랑스어 공부 체험 + 가르쳐본 경험들에 의하면,
아예 그 언어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는
무조건 그 언어에 담그는 것보다
전체 틀을 한 번 보여주고 시작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게다가 이 친구들은 영어권 환경에 사는 것도 아니고,
잠시 수업을 통해 영어를 접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크마이어를 대응시키는 것이 언어를 배우는 데도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접근법은 어학 학습과는 별도로,
예상치 않은 선물로 돌아왔다.
나의 존재 자체로 환대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영어 한 문장 가르칠 때마다,
크마이어 문장을 물어보고 그걸로 가르치니,
그때마다 아이들은 내 크마이어 문장에 대해 ‘선생질’을 하며 기뻐했다.
결국 그 시간 내내 아이들과 나는 동등하게 같은 문장들을 주고받으며 익혔는데,
솔직히 2주 정도의 짧은 프로젝트에서 영어가 늘면 얼마나 늘었겠나.
아이들은 내가 앞에 있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더 설명해 줄 수 있는 손님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내가 자신들의 언어를 빨리 익혀서 설명해 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어떤 외국어든, 시작하기 전에 전체 틀을 보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대일 대응을 해보는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데,
크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크마이어를 소개하는 얇은 책자 두 권을 사서,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부터 공부를 했다.
대충 영어 어순과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 나라 문자를 읽는 것까지는 포기하고,
한국어 발음이 밑에 대충 표기되어 붙은 문장들을 현지인들에게 써보고,
그들에게 발음을 교정받는 걸로 접근했다.
이 방법으로 외국어를 배우려면,
책만으로는 한계가 많았겠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굉장히 유용했다.
현지에서 함께 그 상황을 보내면서 통역해 줄 현지인 프로젝트 멤버에게
그때그때 물어보면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크마이어를 구사하면 되었으니까.
외국인이 나의 모국어를 배우려고 관심을 보이면,
누구나 기뻐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모국어는 나의 정체성의 뿌리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모국어를 구사하려 노력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당연히 알았다.
함께하는 현지인 프로젝트 멤버들은 물론, 아이들도...
관광으로 먹고사는 지역의 아이들이라
자신들이 영어, 간단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말 몇 마디를 배워야 할 일들은 있어도
자신들의 언어를 진심으로 열심히 익혀주는 사람들은 귀하다는 것을.
예상 너머의 환대, 손끝으로 닿다
물론 내가 2주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뭘 얼마나 익혔겠냐만,
그 시간 동안 나의 진심은 충분히 통했던 시간이었다.
아니, 너무 잘 통해서,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매일 선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져왔다.
빨대를 잘라 이어 붙인 목걸이,
풀을 뜯어 이리저리 뭔가를 만들어 오고,
색종이로 뭔가를 만들어 오고,
시를 써서 준 감동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내가 읽지 못한 걸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싸앗 떠꺼~”
이 말이 크마이어로 ‘예쁘다’는 표현인데,
아이들이 어느 순간 나더러 계속해주던 말이었다.
나도 장단 맞춰주며, ‘니들도 싸앗 떠꺼~’ 해주면 아주 좋아했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계속 흙바닥에 내 주위에 앉아서
온갖 자기네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필요하면 통역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외국어라 집중을 열심히 해서 들어야 하는 데다,
너무 많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한 번에 몰려오니.
수업 끝나면 몽롱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이야기하다가 자랑하고픈 게 있으면,
서로 경쟁하듯 흙바닥의 쫀득한 흙을 뭉쳐 찰흙으로 뭔가를 빚어주던 순간들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 악어를 참 잘 빚었다..
내가 장난으로 잘 말하던 크마이어가 ‘크롭쁘 캄! 악어가 문다~’ 였기 때문에!
이 문장의 나의 크마이어는 지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
이건 기억 회수 이후에 의미를 알게 된 거라 덧붙이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곳 진짜 어린 꼬맹이들..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이런 친구들은
내가 몸을 낮춰 자기네들과 하이파이브해주는 것을 정말로 좋아했다.
만약 자기만 놓치면, 멀리서 서운해하면서 달려오기에,
꼭 그 친구까지 기다려서 하이파이브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손바닥을 마주쳐주면서,
‘이게 뭣이라고,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풍선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난 아이들이 왜 풍선 받으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사탕이나 먹을 걸 주는 것도 아닌데...’
의아해 하기는 했다.
그리고 기억 회수 후, 아이들과의 하이파이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보통 리듬이 정렬된 상태이기 때문에,
리듬 정렬된 존재끼리는 손바닥이 닿는 순간 감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순간의 하이파이브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진동의 교환’이었다.
언어 이전의 합으로서, 존재가 서로의 진동을 수용한 순간인 것이다.
아이들이 나와 하이파이브하며 보여준 열렬한 반응은,
정렬된 리듬이 순환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시절도 이미 난 명상과 무의식 정화에 열심이면서,
내 삶의 궤도에서도 안간힘을 쓰며 나의 리듬의 중심을 지키고자 했으니까.
이곳 캄보디아 워크캠프에서
그 외에도 회수해 온 나의 설계도의 기억이 많은데,
어쨌든 가장 큰 경험은
이곳에서 나의 리듬 그 자체로,
존재로 환대받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날씨마저도 내 리듬에 호응할 때
사실 리듬을 지키고 살면 날씨도 응원해 주기도 한다.
나는 나의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여행에선 날씨운이 좋은 편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식 행사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앞서 멕시코 워크캠프 갔을 때도
사실 그때가 우기였다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 그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날씨가 좋았었다.
워크 캠프 끝나는 마지막 날. 폭우가 몇 시간 내린 것 빼곤?
캄보디아는 본격적인 우기여서 비가 많이 오긴 했는데,
여기도 몇 시간 비가 오면 그쳐서 활동에 지장은 없었다.
사실 가장 놀랐던 건...
공식 일정을 마치고 마을을 떠나는 날.
집 앞까지 물이 범람해 온 상황이었다.
캄보디아 가옥들이 2층 높이로 높게 지어놓은 것은
이 시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고,
그동안 꾸준히 불어나던 강물은,
나의 캄보디아 워크 캠프 기간을 다 채운 후에야 마을까지 넘어왔다.
뭐, 강이나 날씨가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적어도 내가 리듬의 부름을 따라 움직이는 기간에는
날씨의 제약은 적게 받더라는 경험으로 봐도 되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