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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이 부르면, 세계로 떠났다.]

- 리듬형 인간의 인연 회수 세계 여행기

by 헤스티아

미학, 그리고 예술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며,

좋아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바로

무용의 쓸모.

쉼의 '열일'이다.



사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기능적 가치를 더하지 않는 쓸모없는 일인데,

사실은 내면의 존재적 관점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그리고 쉼의 열일은 이제 많이들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진짜 창조적인 작업은

갓생이 아니라 쉬는 동안 이루어진다는 것.


정말 많은 창작자의 예술 작품,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발견들이

샤워 중 아이디어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정말로 무용해 보이고,

어찌 보면 무모하기까지 했던

세 번의 해외 체류 경험이 있다.


프랑스 어학연수,

멕시코와 캄보디아 워크캠프.




무용해 보였던 프랑스의 날들이, 리듬을 틔우다


프랑스 어학연수는 순수하게 ‘그냥 가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었다.


불문과 학생들도

‘차라리 영어권 어학연수를 가지 프랑스 어학연수를 왜?’

이렇게 물을 만큼,

프랑스 어학연수는 쓸모의 관점에서는 무용했다.

내가 전공 때문에 프랑스 유학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닌 입장에선 더욱더.



솔직히 당시까진 유학 한 번 가지 않던 순수 국내파로

꽤 큰 국제 행사에서 통역 자원봉사도 할 수 있었으니

영어에 대해선 ‘굳이 어학연수를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원어민급 영어를 원하는 게 아니고,

통번역사로 살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영어로는 크게 불편한 점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교재와 비효율적 학습 환경 속에서

영어를 그 수준으로 올리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다시 새로운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그 수준으로 올리려니

더 열악한 학습 환경 때문에,

그냥 어학연수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프랑스어를 그 수준으로 올려야 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저 좋아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던 시기,

지나가는 말로 엄마가 나의 첫 동기를 떠올려줬다.

“너 어릴 적부터 늘 프랑스 간다고 했잖아.”


그 말에 떠올랐다.

입시 준비에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내가 처음 프랑스를 가보고 싶어 했던 이유가.


중학교 때 난 홍세화 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란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똘레랑스’란 개념을 처음 접했고,

그 나라에 가면 나와 다른 다름을 존재로 인정해 주는 아름다운 가치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의 씨앗을 품었었다.


프랑스 다녀와서 특정한 나라에 대한 이유 없는 미화 같은 건 많이 사라졌지만,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은 너무나 즐거웠다.


이건 개인적 감상이니 차치하더라도,

기억 회수 이후 이 시절이 나의 설계도에서 중요했던 시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프랑스 어학교는 한 번 반이 정해지면 함께 레벨이 올라가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과의 인연이 꽤 중요했다.


그때 난 정말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그 학교 선생님들이 대체로 친절하긴 했지만, 이 분은 정말 멋졌다.



프랑스에선 다수를 부르거나, 상대를 존중할 때 호칭을 다르게 쓴다.

‘tu’라는 표현이 ‘너’라면, ‘vous’라는 표현은 여러분, 혹은 당신.. 같은 느낌인데

번역이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내가 느낄 때 더 정확한 감각은 이렇다.

나는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말을 잘 안 놓는 편이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들은 일부러 말을 높여주곤 하는데,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시절 어른들에게 ‘동등한 존재’로 대접받는 게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으로 존중과 적당한 거리감을 표현할 때 vous를 쓸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도 늘 우리에게 vous 란 표현으로 대해줬었다.



담임 선생님 덕분인지 우리 반은 늘 분위기도 좋았다.

그런데 내가 그 어학교에서 보내던 마지막 날 인사할 때,

그 선생님이 나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보통 아시아 학생들이 많은 초급반은 쥐 죽은 듯 조용한 경우가 많았다.

나도 가르쳐봐서 알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없는 반은 수업하기가 몇 배로 힘이 든다.


그런데 우리 반은 수업 시작 전부터 아래층 교무실까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장난과 웃음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리면

담임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랑스레 이러곤 했단다.


“C’est ma classe. (저 (시끄러운) 반이 우리 반이지요~)”


여러 가지 면에서 멋진 선생님이셨는데,

기억 회수 후 나의 설계도를 알게 되면서

이 선생님과 전혀 뜻밖의 인연이 앞으로 크게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이 할 수 있는 멋진 일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같은 반에서 친해진 나의 중국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건축 전공으로, 유학을 위해 어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제 유학 갈 대학교 근처의 방을 구하러 가야 했다.


하필 폭염으로 인한 사상자가 지역 신문에만 하룻밤 새 80 명 이상 실리던 시기였다.


에어컨이 고장 나자, 절대 공짜 서비스가 없던 유럽 기차에서 무료 생수를 나눠주기까지 했다.


묵었던 호텔방은 옥탑층이어서 더위를 쌩으로 가둬두기까지 했다.

우린 ‘덥다’의 상태를 넘어 이미 유령이 되어버렸다고 고통을 토해내며 지내면서도

짜증하나 내지 않을 정도로 잘 맞는 친구다.


오히려 가족들과 함께였어도 서로 많이 싸웠을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이 친구가 중학생 딸을 데리고 최근에 우리 동네에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딸마저,

나의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선생님과 함께 할 프로젝트에 인연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의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은

무용해 보이지만,

사실 중요한 인연들을 회수해 온,

리듬형 인간의 미래 예지 여행이었다.




리듬 중심을 지켰을 때 도착 가능한 '안전한 세계'


멕시코 워크캠프는 더 무모했다.

이 때는 내면의 리듬이 안내하는 길을 무턱대고 따라갔던 여행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유가 있긴 했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글쓰기의 소재와 자극을 받고 싶긴 했다.

그렇지만 그곳이 이번 생에 발 디딜 일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멕시코일 줄은 몰랐다.


낯선 곳의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는 갖지만,

나는 정말 낯선 환경에선 위험에 대한 경계가 많아서 섣불리 인연을 열지 않는다.

그저 비행기 옆 좌석에서 시간 때울 때 대화하는 정도?


그런 태도로 여행을 가면 다녀올 때까지 출발할 때의 나를 그대로 데려올 것 같아서,

안전한 새로운 인연을 기획했다.



워크캠프에 참여하면, 일단 주최 측에서 참가자들의 신변을 한 번 확인해주기도 하고,

같은 목표로 모이기 때문에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굳이 불편한 숙소에서 자면서 자기 돈을 내고 자원봉사까지 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덜 위험할 것 같기도 했고.


물론 어느 집단이든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안전하게 새로운 사람들과 얘기 정도는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수많은 워크캠프 중에 왜 하필 멕시코였을까?

다른 프로젝트보다 참가 자격과 일정이 맞기는 했었다.


그래도 너무 먼 곳이고,

멕시코는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내가 갈 프로젝트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내면 리듬이 내게 이곳을 가라고 강하게 떠밀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제안이어서

몇 번을 다시 확인했지만 계속해서 나의 내면 리듬은 멕시코 워크캠프 참가를 권했다.



계속 말해왔지만, 난 이미 여러 명상과 기수련 등을 해오고 있었고,

그 당시엔 특정한 방식으로 내면과 소통 중이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나의 빛의 언어 계열 마스터 스승도 내게 노골적으로 주의를 준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내면 소통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알게 되더라도

무조건 그대로 따르고 행동해선 안된다.



우리의 내면은 생각보다 교묘하게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일정 단계 이상의 명상 수련, 리듬 정렬에선

스승이 꼭 필요하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다만 나는 그 시절 내가 겪는 모든 감정을 정화하면서,

나의 내면으로 흡수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화로 발산하기 쉬운 수많은 부당한 일들을

전부 껴안고 정화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이 작업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의 리듬 정렬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다행히 나의 내면의 소리가 거짓으로 인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떠났던 멕시코 워크캠프 시간은 결과적으로

언어도, 시스템도 통하지 않는 낯선 리듬 속에서

내 리듬만으로도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여행이었다.



멕시코 여행에서도 내게 의미 있는 많은 인연들을 회수했고,

또 내가 길어와야 했던 이야기들도 찾아왔다.


이 인연의 의미와 길어왔던 이야기들은

차차 다른 기회를 통해 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멕시코 워크캠프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고,

그래서 스페인어도 잘 몰랐고,

내 돈 내고 봉사활동 떠나는 몇 주간 휴가 여행은 전통적 의미의 실용성은 전혀 없었지만,

(심지어 자기소개서와 봉사활동 계획서? 같은 것도 써야 했음.)


그 세계 안에서도 나의 리듬이 중심을 지켰을 때,

그 리듬이 나를 살게 했고, 보이게 했고, 움직이게 했고, 선택하게 했고, 기억하게 했다.



위험할 뻔했던 두 번의 순간에도 나의 리듬은 나를 지켜주었다.


공식 봉사활동 시간 후 오후 자유 시간에

자원봉사자 숙소 바로 뒤에 있던 수공예품 시장에 친구들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나의 중요품들을 얼추 챙긴,

작은 크로스백계의 보부상 보따리 버전의 가방을 메고 있었고,

수공예 직물이 내 기준에선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덥석 샀다.


사실 지금도 그들의 손품에 대한 값으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비교적 큰 크로스백을 매고 가격 흥정도 않고 덥석 사는 내 모습이

‘부자부자부자’처럼 느껴졌나 보다.


어떤 이상한 남자가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틈을 노리고 있었는데,

시장 할머니들이 나더러 스페인어 하냐고 물어보더니 설명을 해줬다.


여전히 말은 잘 못할 때였지만,

그래도 조금 공부해 간 덕에 그분들의 이야기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뒤를 이상한 남자가 아까부터 계속 따라다니니 조심하라는 것.


그 순간 소름이 끼치며,

미로 같은 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당황하고 무서운 데다,

스페인어도 잘 몰랐지만,

딱 필요한 두 단어,

donde와 salir/ 어디인지, 출구가...

이건 마침 떠올라서

시장 할머니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또 한 번은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할 뻔했다.


일주일 간의 봉사 일정을 끝낸 주말.

희망자들에 한해 친환경 리조트로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그곳은 일종의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샤워실은 천장 없는 칸막이에

주황색 알전구 하나.

별 빛을 받아

큰 고무대야에서 물을 퍼서 써야 할 정도로 무소유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고,

바람도 따뜻해서

오히려 일시적 낭만으로까지 느껴지던 경험이었다.



그곳은 우리 자원봉사 장소에서 차로 3시간가량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워크캠프 주최 측에서 교통편을 마련해 줬는데,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트럭 뒷좌석에 한참 매트리스를 싣고 있기에 짐을 정리하는 줄 알았는데,

다 싣고 난 후 우리더러 그곳에 타라는 것이었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천막으로 가려진 트럭 뒤는 찜통 같았고,

옆 차선에 함께 달리던

차 뒷칸에 실려 이사 가던 소들을 보며

우리와 비슷한 처지구나 농담하며 떠나던 여행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트럭은 고속도로에서 번번이 세워졌다.

그때는 몰랐고,

모르는 게 약이었다는 게 정말 맞는 상황이었는데,

우리 트럭은 연방 경찰에 요주의 경계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날 우리 트럭은,

누가 봐도 인종과 체형의 조합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아프리카계 프랑스 친구들 (남녀), 동양 여자들, 유럽 여자들...

아마도 그곳 연방 경찰들 눈에 우리 트럭은

지역 어딘가로 향하던 ‘어둠의 비즈니스 차량’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워크캠프 참가자고, 자원봉사를 위해 온 것이다라고 몇 번을 말했고,

주최 기관과 주고받은 메일도 보여주고,

주최 기관과 전화 통화도 했는데

세 번이나 잡혔다.



그곳은 경찰 권한의 작동 방식이 내가 익숙한 구조와는 달랐다.

불문율과 직감, 타협이 엇갈리는 풍경 속에서,

현지인 친구는 오히려 이 상황이 잘못 흘러갈 경우에 대한 심각성에 겁을 먹고 있었는데,


나는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해서

오히려 가장 당당하게 나의 리듬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다.


연방 경찰이 헬맷을 스고 선글라스 너머로 고압적으로 우리를 쳐다볼 때,

나 역시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니, 선글라스 너머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의 리듬의 중심이 고요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또 다른 시빗거리가 될 수 있던 상황이었지만,

결국 중심에 도달한 리듬은

우릴 아무 문제 없이 안전하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게 해 줬다.



그 이외에도 여행 내내 나의 리듬으로 인해 보호받고 있었던 순간이 많았고,

그래서 위험할 수 있는 멕시코 여행에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 브런치 매거진에 이미 공유한 바 있지만,

멕시코가 위험한 곳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사실 멕시코란 나라를 잘 모르고,

난 잠깐 스쳤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돌아온 여행자로서 말하는 건데,


멕시코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사람 사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대신 모든 위험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건 알고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리듬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함부로 스스로를 과신하지 말고,

늘 주의해서 여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존재 자체로 환영받는 경험


그렇게 멕시코 워크 캠프를 다녀온 이후, 캄보디아 워크 캠프 프로젝트를 보게 되었다.


굳이 연속으로 떠날 이유는 없었는데,

이곳 프로젝트의 성격이 너무 나를 위한 맞춤형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젝트.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를 좀 더 잘했다면 할 수 있는 활동들이 많았을 건데...

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영어 가르치는 일이라면 당시 나의 일이기도 해서 자신 있었다.



그렇게 떠났던 캄보디아 워크 캠프에서도

기억 회수 이후 꺼낸 나의 설계도에 연결된 경험들을 회수해 오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이 시간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지키고 살 때,

존재 자체로서 환영받는 경험을 하게 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글이 길어져서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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