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하나로 인생이 바뀌진 않는다. 워크캠프 가서 간소한 불편함에 적응이 되다가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원래 누리던 것들을 다 누리고 산다. 현지 스태프가 첫날 자기는 감기 기운이 있으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멀쩡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을 보며 따뜻한 물의 위력을 알았다. 보일러가 작아서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던 숙소 생활을 생각해 보면, 멕시코 시티 호스텔에서 뜨거운 물만 충분히 나와도 감사했는데, 한국에선 그 자체도 생각지 않는다. 가끔 감기 기운이 돌 때, 현지 스태프의 말이 생각나며 따뜻한 물의 고마움을 되새길 뿐이다.
그렇지만 멕시코에 가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키워드를 몇 개 얻어 왔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까사스 지역의 벽에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글자가 자주 보인다. EZLN.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90년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키워드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낯선 단어다. 워크캠프 참여한 팀원들 중 한 명이 졸업 논문 주제로 사파티스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서 난 처음 들어보게 되었다.
이미 내가 다녀올 무렵에는 혁명적 운동보다는 원주민 권익을 위한 교육, 경제 자립 등의 활동에 집중하던 시기라고 해서, 실제 사파티스타의 활동 분위기를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내에서는 느끼지 못했다. 가이드를 통해 이들의 활동 지역을 가볼 수 있는 투어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우린 가지 않았다. 대신 동네 여기저기에 적혀있는 EZLN 단어들,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파티스타 활동에 기부하는 형태로 이들의 운동을 지지하는 레스토랑들, 혹은 사파티스타 관련 제품을 파는 기념품 샵들이 보였다. 기념품 샵에선 조잡하지만 가격대비 매우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스키 마스크를 쓰고 말을 탄 사파티스타 대원 인형이라든지, 예쁜 일러스트가 그려진 노트, 엽서 등을 팔았다. 일러스트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El otro mundo es posible(the other world is possible).”
감동적인 문구다. 실제로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한 감동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문제는 ‘다른 세상’의 정의가 어떠하냐는 거지.
사실 좋은 의도의 이념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집단이 되었을 때, 집단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집단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따라,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집단을 판단하지 않는 대신, 한국에 돌아와서 사파티스타를 언급한 책들을 찾다 보니, 전혀 손에 닿지 않았을 책들을 종종 만났다. 그중 가장 좋았던 책은 윤여일 작가의 『여행의 사고』 시리즈다. (죄송하게도 돌베개 출판 여행.. 까지만 생각나고 정작 책 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여행을 하며 뭔가 불편하게 느끼던 지점에서 말로 정리되지 않던 지점을 누군가 이렇게 잘 풀어주니 고마웠다. 사실 인문학 공부의 가장 큰 장점이, 이미 누군가 똑똑한 사람들이 먼저 생각해 놓은 것을 주워서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림 여행으로 시작되어 내면의 창의성을 연결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해서 그동안 읽은 책이 3000권도 넘는다. 이제 내겐 또 다른 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다.
약간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기에 어떻게든 우연한 인연들을 찾고,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실제로 꽤 오래 기억나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첫날 만난 현지 스태프와 매지션이라 부른 프랑스 친구는 둘 다 내면의 창조성을 유지하며, 독립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유지하는 삶의 표본 같았다. 그들의 예술성과 어떤 환경에도 유연하게 맞춰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사실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 지역으로 워크캠프를 간 것은 우연인 것 같기도 한데, 또 아예 우연이 아닌 것도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 어쩌다 여행생활자로 유명한 유성용 여행작가가 나오는 세계테마기행 재방송을 봤다. 아주 오래전, 2008년 즈음 방송된 에피소드였다. 내게 이 방송이 의미 있던 건 세계테마기행을 우연히 알게 된 에피소드여서다. 어느 날 채널을 돌리다가, 한 인상 좋은 여행자가 동네 꼬마애들 망고를 들어주며 길을 함께 걷는 장면을 보고 그대로 채널을 고정시켜 봤다. 그렇게 그 방송이 세계테마기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종종 보았다.
그런데 내가 처음 본 유성용 편이 멕시코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를 다루고 있었다. 세계테마기행을 보던 당시 이 지역이 멕시코라는 것만 알고 봐서 다른 정보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워크캠프를 다녀와서 보니, 그 에피소드에서는 차물라 마을도 나왔고, 내가 차물라 마을에 갈 때 우릴 안내했던 가이드도 나왔다. (어쩌면 그 지역 가이드가 한 명일 수도 있지만, 관광객이 매일 많았고, 영어, 스페인어 전담 가이드가 따로 있기에 꼭 그 사람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 같다.) 재밌는 우연이라 생각해서 멕시코 친구들에게 한국방송에 나온 가이드의 사진을 캡처해서 공유하기도 했다.
처음엔 카모메 식당 같은 우연을 꿈꾸며, 대신 안전한 여행을 꿈꾸며 멕시코 워크캠프로 떠났다. 그런데 그 여행에는 단지 우연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칼 융이 말한 공시성의 우연도 있었고, 단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여행 이후에 꾸준히 여행이 건네준 키워드를 넓혀온 나의 노력도 있었다. 우연의 형태라도 만날 사람은 만나고, 또 우연한 계기가 있어도 결국 가꿔나가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연을 꿈꾼 멕시코 여행은 딱 그만큼의 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