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누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다. 정말 참신하고 재밌는 영화다. 특히나 마지막 희망의 장소인 [시온]에서의 전투신은 가히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워쇼스키 형제(이제 자매이다)의 상상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그중 내가 진심으로 인상깊었던 장면은 영화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모피어스(로렌스피시번)가 네오(키아누리브스)에게 빨간색 알약과 파란색 알약을 주면서 선택을 하게 한다. 파란색 약을 먹으면 매트릭스 세상에 남게 되고 빨간색 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 네오는 빨간색약을 먹으면서 진짜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워낙 유명한 영화이여서 그 이후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직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뇌 안의 프로그램된 대로 항상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이다. 진짜 진정한 나의 모습은 따로 있는데 뇌에 입력된 대로 살고 있진 않는지 의심이 생겼다. 언젠가 나도 빨간색 알약을 먹을 날이 오겠지(웃음). 어쩌면 내가 먹는 우울증 약이 잠시나마 빨간색 알약의 효과를 보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좋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어느정도 효과를 보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빨간색 알약(우울증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습관이 되버린 약 먹기. 약을 먹지 않으면 축 쳐진 기분을 안고 회사에 출근해야한다. 그런 기분으로 출근하게 되면 그날 하루는 안 봐도 뻔하다. 하루종일 무기력에 시달릴 것이다. 약을 먹지 않으면 업무에 집중이 안되고 작은 일에도 주눅들어 하루를 살아갈테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약을 갖고 다닌다. 잠깐의 외출에도 우울증약과 편두통약을 꼭 갖고 다닌다. 언제 어떻게 나의 기분이 무기력해질지 모르니까. 10년이 넘도록 내 손에서 떠나지 못하는 알약들. 특히 가족들에게는 이 알약은 비밀이다. 왜냐구? 나는 건강한 가장이어야 하니까.
회사에서의 생활은 더 불편한 것이 많다. 사회생활은 정글 같은 곳이다. 약해보일 때 공격당한다. 내 기분이 안 좋을 때 가족처럼 묻지 않는다. 누군가 와서 위로해주거나 하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 내가 무기력해져 있을 때 잘 모르는 업무지시가 떨어지면 끝도 없는 무기력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주어진 업무에 집중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의 상태에서 창의적인 업무를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무기력은 잘 표시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은 마음이 아픈 병이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속의 우울감은 사람의 감정을 메마르게 한다. 그래서 늘 피곤한 것처럼 힘이 든다. 정신이 힘들어지니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어지니 결국은 늘 주눅들어 있는 것이다. 주눅드는 것은 영어로 표현하자면 lose heart 이다. 마음을 잃는 것, 결국은 나 자신을 잃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
우울증에 의한 무기력도 병이므로 약을 처방 받는다. 약을 먹고 나면 기분이 나아진다. 어쩔때는 기분이 좋아져서 의욕이 넘치는 순간이 있다. 이런 상태로 일을 하면 훨씬 업무능력이 향상 된다. 타인의 공격에도 유연하게 받아칠 수 있다. 하지만 이런것도 진짜 내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약에 의존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 효과가 떨어지면 또 다시 무기력이 찾아온다. 그럼 또 다시 약을 복용한다. 약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약중독에 걸리는 것이다. 약을 먹으면 기분은 잠시 좋아지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리미트리스라는 영화에서도 나의 공감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하류 인생을 살아가는 작가가 어느날 친구로부터 받은 알약 하나로 뇌를 100프로 쓰게 되면서 모든 일들을 천재의 시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흥미로왔다. 그중에서 약을 먹으면 주인공의 초췌했던 모습이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는 장면은 나로 하여금 우울증 약에 대한 공감을 가지게 해주었다.
약을 먹으면 내 안의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순간이 영화속 주인공과 많이 닮았다. 늘 이런 모습으로 생활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니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는 병. 그것이 무기력인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을 해서 다르게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무기력에 찌든 모습이 아닌 밝은 모습도 숨어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하나의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자아중에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자아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있으면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도 유연성만 있으면 적절한 해결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유연성이 부족한 것이다. 무엇이 먼저인 걸까. 무기력해지니까 유연성이 없어지고 유연성이 없으니 무기력해진다. 이것 역시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만 안다면 나는 주위환경에 주눅들지 않고 자유로운 나를 발견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지도로 보면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하면 그 하위레벨의 의식들은 모두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의식이 높은 수준에 있다면 내가 겪는 무의식의 환경은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이지 무기력을 겪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무기력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순간에 무기력에 빠지는 걸까. 자문자답의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원인을 따라가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내가 휴직을 한 이유는 무기력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을 직장상사에게 들킨 것 같은 수치심이 들어서이다. 직장상사의 기준에 내가 그 만큼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수치심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왜 직장상사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된 것인가. 타인의 기준은 그사람이 정한 기준이고 나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일일이 나를 평가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다른 사람의 기준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타인이 살아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건 내 소신대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단점이 있고 그 단점이 타인의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이다. 업무 파악이 늦어 업무처리를 빨리 하지 못한 것, 업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점, 이런 것들이 직장상사의 기준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기준을 생각해봐야 한다. 일처리를 정확히 하기 위해 몇 번이고 확인했던 점, 실수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 나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쳐나가면 되는 것이고 나의 기준대로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대로 사는 것이 아닌 나의 기준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 타인의 기준으로 맞춰 살아가야 편하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기준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타인의 평가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겪어야 할 세금같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겪는 통과의례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런 것이 유연성이지 아닐까 싶다.
오늘은 생각의 전환이 자유로운 것을 보니 빨간 약의 효능이 잘 받는 것 같다. 내일은 약을 먹지 않고도 이런 깨달음을 잊지 말고 나에게 되뇌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