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나사 Aug 23. 2020

5. 아버지와 집을 짓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모든 사회적 활동들이 제약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게 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해서 옆사람과 2미터 이상 간격을 두는 생활방역을 시작하였다. 온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어렸을 때나 상상하던 것이 현실화 되었다. 나 역시 집에 갖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가족이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니 기분좋게 받아들여야 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더욱이 난 휴직상태이다. 경제적인 부분을 집사람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지만 집사람이 하는 학원사업도 코로나로 인하여 당분간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수입도 전무하고 나는 휴직 상태이니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불안은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는 것이 나의 무기력 극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때마침 아버지께서 시골에 농막을 짓고 싶다고 하셔서 컨테이너를 사들였는데 농막이 컨테이너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에 따라 지붕도 만들어야 하고 화장실등도 만들어야 했다. 마음 같아선 시공전문 기술자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 부득이 직접 만들게 되었다. 아버지나 나는 둘다 이런 일을 해본적이 없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했다. 

 아버지와 나는 사실 사이가 좋지 않다. 아니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둘이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 꼭 관계가 틀어졌다거나 서로 얼굴을 안본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잠깐 부모님에 대해 얘기하자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드신 분들이다. 아버지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3남 3녀 중 2째로 여섯 자녀중 유일하게 시골에서 농사지라고 할아버지가 스카웃하셔서(웃음) 가르치는 것에 투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말로는 시골에서 농사짓기 싫어 집에서 도망 나왔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씀하시는데 당신 스스로도 배움이 짧은게 늘 한으로 남아있는 듯 했다. 어머니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에서 대전의 방직공장으로 취업하셔서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두분은 지인의 소개로 만나 사랑을 꽃피우다 결혼하셔서 지금의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하셨다. 당신들 두분다 배움이 짧은 것이 한이 되셨는지 첫째인 나에게는 늘 엄격한 교육열을 보이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많이 맞으면서 공부를 한 기억이 있다. 산수가 느리다고 맞고 숙제 안했다고 맞고, 또한 어머니 스스로도 시댁 식구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에게 화풀이를 하셨다고 고해성사를 가끔씩 하셨다.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나도 고학년이 되면서 모범생의 표준이 되어가면서 어머니의 학업방향과 맞아떨어지다 보니 더 이상의 학업욕심을 내지 않고 지켜보시는 편이었고 나 역시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공부잘하는 학생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긴 어머니께서 오락실을 가지 말라고 어명을 내린 것을 지키기 위해 대학생이 될 테까지 오락실을 한번도 가지 않는 말 잘 듣는 아들이였다. 

 아버지는 반대로 엄격하진 않으신 분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가 우리에게(여동생이 한명 있다) 체벌을 위해 손을 대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만큼 좋은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와의 관계가 좀........이상하다. 지금도 내 핸드폰에 저장된 아버지의 전화번호 목록은 “오분만 대화”이다. 세마디 이상 대화가 오가면 우린 언성이 높아진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여동생도 아버지와 대화하기를 싫어한다. 몇마디 대화를 나누다보면 화가난다고 한다. 개인 택시만 30년 이상 하셔서 그런가, 좁은 차안에서 운전만 하셔서 그런가. 아버지는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의 공감 능력이 현저히 낮아보이는 특이한 성격이였다. 한마디로 대화가 잘 안된다. 그래서 서로에게 인색하다. 속 깊은 이야기나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대부분 어머니와 풀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나처럼 소심하지마라.”였다. 어렸을 때는 그냥 받아들였던 아버지의 행동과 말들이 성인이 돼서 생각해보니, 아니 이렇게 내가 무기력에 힘들어하고 세상에 주눅들어 살다보니 아버지의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이해되어갔다.  

    

"그렇게 이해가 안간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아버지가 되고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써 그 몫을 해나가고 있다보니 당신 역시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나는 힘들게 살아오신 아버지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우린 너무 똑같아서 대화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서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두사람의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더욱이 둘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보니 많은 대화와 협동같은 것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다. 기초도 다져야 하고 전기공사도 해야 하고 지붕도 올려야 하고 용접도 해야했다. 처음해보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시골일로 잔뼈가 굵으신 아버지가 어느 정도 일의 순서를 알고 있어서 나는 주로 보조를 하고 큰 일은 아버지가 다하셨다. 그래도  비 전문가가 하는 일이다보니 지붕도 수평이 맞지않고 여기저기 틈이 생겨 비가 오면 물이 새었다. 우여곡절 끝에  1월에 계획한 농막 짓기는 3월이 돼서야 마무리 되었다. 나 역시 2개월 동안 대전에서 공주를 오가며 농막 짓기에 열중한 것 같다. 만약 집에만 있다가 무기력에 빠져서 휴직의 의미가 없어지면 않되기 때문에 농막 짓기에 더 열중했던 것 같다.덕분에 아버지와 농막을 지면서 그동안 못했던 대화도 많이 하고 공사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면 서로 상의도 하는 놀라운 경험도 하게 되었다

 코로나 유행은 더욱 심해져 집 밖에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집에서만 있어야 되니 시골로 들어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해서 무기력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였다. 무기력은 예고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찾아오고 시골로 농막을 지러 가는 운전중에도 찾아오고 농막을 지으면서 갖는 휴식중에도 찾아왔다. 또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있는 시간에도 마음의 공허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 안의 무의식이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은 미뤄둔 채 다른일에 집중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였다. 왜냐하면 집 짓기는 휴직 동안 내가 해야할 일은 아니였기 때문이다. 무기력을 치료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집중하는 힘이였다. 그동안 무기력과 함께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함 때문에 10분이상 집중하는 시간이 없었다. 목표를 향해 집중하는 내모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무기력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해야 할 일은 미뤄둔 채 보상심리로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때론 그 다른 일이 터무니없이 이루기 힘든 것이여서 무기력이 또 다른 무기력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미뤄둔 채 그만 두고 이직을 꿈꾼다거나 다른 일을 하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현실은 지금 처한 회사일에 집중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자 기술사 시험에 도전한다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코로나 유행을 핑계로 집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였다.

어쩌면 휴직이나 기술사 시험 도전이나 그 외에 내가 계획 했던 것들이 또 다른 나의 무기력의 모습은 아닐까. 현재에 만족하고 회사 생활에 집중하는 것이 무기력을 이겨내는 방법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뜬 구름만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

 이제 집짓기도 끝나고 더 이상 무기력을 잊기 위해 집중할 핑계거리가 없어졌다. 그래도 농막에서 쉬고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무언가 하나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긴 했다.


이전 04화 4. 빨간색 알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