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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May 05. 2024

혼돈



‘삶에 주어지는 감정들은 총량의 법칙을 따를까?’

누구나 행복한 감정, 기쁜 감정, 설레는 감정 같은 좋은 감정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닐 거다. 삶의 다양한 감정이 모여 100이라 하면 절반이 좋으면 절반은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혼돈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또는 그런 상태.


평화로운 일상에 예고편 없이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 본 일이 있는가?


“미리 알고 있으면 그만큼 재미가 없지.”

“왜 드라마에서도 반전이 재밌잖아. “

나보다 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선화언니가 이야기를 듣고 처음 나에게 한 말이다. 처음에는 언니의 놀란 감정이 담긴 걸 알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마치 불난 마음에 기름이 한 스푼 던져진듯해 언니 얼굴을 잠시 빤히 보았다. 시간이 지나며 그 말들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정신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툭툭 던진 언니의 말이 혼돈의 색을 옅게 했다.


5월 초 아침 일찍 나섰다. 갑자기 생각나는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내 시간을 귀하게 여겨 주는 그의 마음을 떠올리며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낮기온은 20° 정도에 머무르며 쾌청한 날씨를 자랑하는 지금 아침 바람은 차가운 날씨의 질투인 듯 조금은 차갑다.


적당하게 차가운 바람은 호흡 가쁘게 운동을 한 뒤

셔벗 아이스크림을 먹는 기분이다.


이 표현이 딱 맞다고 생각했고 마음에 참 들었다.

누군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나는 항상 어딘가 구멍이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 “아침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나: “어…응, 너무 마음에 드는 생각이 떠올라서 “

그: “응? 그게 뭔데? 마음에 드는 생각, 난 네 목소리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


그는 밤 목소리에 익숙하다가, 뭔가 좋은 것을 발견해 한껏 청량해진 내 목소리를 처음 듣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나: “지금 날씨, 아침바람, 운동을 숨차게 한 뒤 셔벗 아이스크림을 먹은 듯해, 기분이 좋아. 머릿속이 상쾌해져 “

그: ”아침 바람 궁금한데… 내일 아침에 만날래?”

나: ”응?, 응…, “


전화를 끊고 내 머릿속에는 아침바람의 기분 좋은 상쾌함이 가시고 혼돈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두근거리는 혼돈이었고, 내 안에는 두 가지 갈등이 서로의 이야기가 맞다며 으르렁댔다. 그를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실망을 할까는 걱정보다 그에게 의지할 것 같은 나약해진 내 마음이 걱정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집에 도착해 옷장에 있는 옷을 뒤적이다가 운동복을 싹 끄집어 내 거울 앞에 섰다. 운동복 중에 가장 핏이 좋고, 얼굴색과 어울리는 것을 고르고, 운동화를 매칭시켰다. 헤어밴드를 하고 얼굴에 팩을 붙였다. 손톱 정리를 하고, 눈썹도 정리했다. 두근대는 혼돈 상태에서 하루 종일 나를 가꿨다.


그것은 그에게 나약해진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시간이 느리게 가길 원했지만, 어느새 밤 9시,

그의 전화 목소리는 어느 날보다 밝았고,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한때 내가 세상 전부였던 남자는 10년 만에 그 세상을 만난다.


전날 날씨가 어느 날보다 따뜻하고 화창했다. 셔벗 아이스크림보다는 덜 차가운 아침이었다. 바람도 고요했다. 아쉬웠다. 어제 그 느낌을 그와 함께 만나고 싶었다.


그: 오랜만이야.

나: 하나도 안 변했네.

그: 아니야, 이것 봐.

웃어 보이는 그의 눈가에 주름이 멋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그 주름만큼 멋지게 세월을 밟은 것 같았다.


그: 너야 말로 똑같아. 그날과 똑같아.

나: 야! 너~!

우리가 헤어진 날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는 정말 변하지 않았다. 편안했다. 나를 숨길 애씀도 불필요했다.

머릿속 혼돈이 싹 가셨다.


그는 자연스럽게 눈빛, 말투, 태도로 여전히 나를 최고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고, 세상에 숨어 작은 존재로 웅크려 있던 나는 그날, 기지개를 켰다.


‘삶에 주어지는 감정들은 총량의 법칙을 따를까?’


나의 혼돈은 <피리 부는 소년>을 닮았다.


매우 간결하고 파격적인 초상화 작품으로 그 당시 초상화들은 화려한 배경을 배치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마네는 모든 배경을 일절 생략했다. 마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인물 사진과도 같다.  파격적인 시도로 살롱전에서 낙선했지만 현재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꼽힌다.



내가 아는 그의 삶이 그랬다. 창의적이었고, 스페셜했다. 10년 전, 지독하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도 평범한 일은 아닐 거다. 그가 그의 삶에 얼마나 몰입하고 열정을 쏟아부었을지는 짐작으로 안다.


에두아르 마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는 비난을 받은 반면 젊은 화가들을 주변으로 불러 모으는 힘이 되었다. 마네는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 사용을 특색으로 하는 화풍을 개척하였고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로 거론된다. 낯설고 새로운 회화, 그것이 혼돈과 닮아 있었다. 그의 작품을 접한 누군가가 그랬을 거다. 입체감에 대한 획기적인 표현방식, 시각의 자율성은 누군가에게 혼돈을 주었을 테다.


< 피리 부는 소년>은 피리 부는 소년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긴 시간 동안 소년병을 모델로 쓸 수 없게 되자, 실제 주인공은 마네의 모델인 빅토린 뫼랑으로 대체했다는 그림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그림에 대한 열정, 새로운 시도, 그것들이 <피리 부는 소년>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나: “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

그: “그래야 재밌거든”


마네도 분명 그와 같이 답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내 그가 부러웠다.


‘재미? 난 그걸 언제 느껴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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