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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May 11. 2024

열심



열심히 사는 게 재밌다니,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진심을 느끼며, 스무 살 시절 그를 떠올렸다. 그는 그럴 수있겠다 싶었다. 그는 누군가가 생각하기에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 어려운 학교의 프로젝트를 곧잘 해냈다. 어떤 일들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고, 집중하고 몰입하여 그것들을 해냈다. 그런 그가 꽤나 믿음직해 보였다.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는 오직 너였으니, 우리의 만남은 그의 열심인 보살핌으로 꽤나 오래 이어졌다.


열심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씀.
또는 그런 마음.


정말 그는 나에게 정성을 다했다. 스무 살의 첫사랑, 그때 그에게는 내가 세상 전부였을 테니, 삶에 주어진 역할들을 완벽히 해내며 나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는 잠을 줄여가며 하루를 보냈다. 그것은 나에게 최고의 멋짐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어긋나버린 시간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랑에 아무리 열심이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연락으로 이어졌던 때가 있었지만, 어긋나 버린 시간은 다시 연결되지 못했다. 내내 마음속에서 그는 사라지지 않는 존재였지만, 뭐 그렇다고 그를 다시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내 시간 중 가장 빛이 났던 수많은 날을 마음의 작은 한편에 담아 두었다.


지금 그가 내 옆에 있다. 웃으며 눈가의 세월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직하고 멋졌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편안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가 더해진 그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나: 내 시간이 아깝다고 해줘서 갑자기 머리에서 종이 울렸어.

그: 아프진 않았어?

나: 농담 아니고, 고마워.

그: 뭘 하고 싶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네 시간에 함께 하고 싶은 건?

나: 그림? 어릴 때 좋아했던 것을 어른이 되어서 하면 좋다고 하더라. 습작처럼 그리다가 너 이야기 듣고

시작했어. 시간이 없어진 것처럼 빨리 지나가. 그런데 또 점점 그림이 형태를 잡아가더라고. 그게 재밌어.

그: 마음은? 네 마음은 어때?

나: 뒤죽박죽, 아직 뒤죽박죽이야. 나 있지, 매일 밤 가위눌림으로 힘들어서 어떤 날은 앉아서 자는데, 다행히 가위눌림이 오진 않더라. 신기하지? 대신 숙면을 못해서 힘들어.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을 하면서 좀 좋아지긴 했어. 너랑 통화하고 나면 바로 잠이 들거든.

그: 뒤죽박죽 된 거 풀어주고 싶네.

나: 지금 너 충분히 그러고 있어. 시간이 지나야겠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아도 옅어지겠지.

그: 늘 열심히 뭔가를 하는 삶이었는데 내 인생에서 하나를 놓쳤어. 너. 후회해.


그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장 내려앉은 심장을 제자리로 잘 가지고 왔다. 마음에서 죄책감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왠지 그를 이용하고 있는 느낌에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 이제 들어갈게.

그: 응, 9시에 통화해. 뭐 할 거야? 그림?

나: 응, 그림. 나 뛰어갈게.


무슨 말을 꺼내려는 그를 두고 뒤도 보지 않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뛰어 집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탁 막혀왔다. 붓에 물을 적시고, 물감을 가볍게 들어 녹였다. 막혔던 마음이 함께 녹아내렸다.

그가 놓쳤던 나의 젊은 날을 색으로 물들였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색을 얹히니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그때의 내가 점점 드러났다. 겹쳐진 색들이 탁할 법한데 투명한 내가 보였다. 그의 이야기 앞에서 불쑥 나온 죄책감과 자괴감의 감정이 사라지고,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밤 9시, 나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 9통, 뭐든 참 열심인 그가 맞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혼돈 속에 갇혀 내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감정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것을 정돈하려 나는 붓을 든다. 그리고 또 물감을 입히고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렸다 또 물감을 입히며 느꼈다. 열심히 하는 일이 참 재미가 있음을..., 재미가 있으니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을. 이것이 그가 살아온 평생의 삶이었음을.



David Hockne의 작품 [Garrowby Hill]이 생각났다. 길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바라봐지는 길의 끝에는 왠지 행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책에서 그가 이야기한 구절이 생각이 났다.


“세계는 아주아주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열심히 그리고 자세하게 보아야 한다.”


나는 나를 비우고, 나를 알아가기 위해 열심히 그림에 몰입해 보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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